•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 한글 서예의 발흥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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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수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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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서예의 발흥은 정음 반포 당시의 원형으로부터 추출된 고체(古體)의 출현과 궁체(宮體)의 작품화를 통해 비롯되었고, 한글 궁체 교과서는 1910년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이 만든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이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1년·1913년 유한익이 지은 『보통학교습자첩(普通學校習字帖)』이 발행되었고, 193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서방수본(書方手本)』이 간행되어 이 책으로 정자 및 판본체를 보통학교에서 학습하였다. 이러한 학습과정을 거쳐 한글 서예는 민족 정신과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일제치하에서도 몇몇 서예가들에 의해 미미하게나마 유지되었다. 한글 서예작품의 첫 시도는 1921년 윤백영(尹伯榮, 1888∼1986)의 개인작품 <송인종황제권학서(宋仁宗皇帝勸學書)>가 궁체로 선보이면서 시작되었는데, 윤백영은 순조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영손녀(令孫女)로, 궁중에서 순원왕후와 덕온공주, 윤용구의 글과 서사 상궁들의 글을 가까이 접하면서 한글 서간체를 자연스럽게 익혔고, 끊임없는 수련과 학문적인 연찬으로 인하여 격이 높은 글씨를 남겼다. 궁체 흘림으로 쓴 작품을 서화협회 회원전에 최초로 낙관 형식까지 갖추어 출품하여 한글 서예사에 남긴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며, 그 동안 실용성의 생활 수단으로만 쓰였던 한글 서예가 예술의 한 장르가 되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 제8회·제10회에 각각 입선하여 전문서예가로 인정받았다. 1922년 선전 1회에서는 김녕진이

<언문>을 궁체로 써서 입선하여 공모전에서도 한글 서예작품이 수상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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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백영, <송인종황제권학서(宋仁宗皇帝勸學書)>
윤백영, <송인종황제권학서(宋仁宗皇帝勸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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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23년 선전 2회에는 김돈희의 <조선문>과 권홍수의 <송백노가훈>, 1929년 선전 8회에서 윤백영의 <조선언문>, 김기용의 <여덕>이 입선되었고, 같은 해 동아일보 주최 ‘전국 학생 작품전람회’에서 이철경의 <오우가>가 2등상을 수상하였다. 1930년 선전 9회에 김녕진이 <언문고요>, 1932년 이철경이 조선서도전 1회에 입선, 1935년 남궁억의 개인작품 <선인시조>, 1942년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의 개인작품 <선원선생 훈계자손자> 등이 모두 궁체로 작품화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 문자인 한글은 서예로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한글 서예에 대한 연구는 김충현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 1942년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하였으나 출판은 보류되었다.

이상과 같이 19세기 후반의 서풍은 추사 서맥과 더불어 미불과 동기창 초서의 영향이 계속 이어졌으며, 점차 청대의 유용과 하소기, 옹방강의 서풍과 섞이면서 첩학의 계승이 이어졌다. 특히, 하소기의 행초 서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서풍의 근간이 되는 안진경의 행초가 새롭게 조명되어, 송대의 소식과 황정견의 행초에도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비학의 관심으로 전서와 예서를 많이 썼으며, 오창석과 제백석 전각의 유입과 일본의 가와이 센교 등의 전각풍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 일제시기에는 전람회를 통해 한문서예와 한글서예, 전각, 문인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출현하여 서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각 서체별 서예가와 서풍을 살펴보면, 전서와 예서에서는 오경석·김석준·정학교·정대유, 전서와 전각에서는 정학교·오세창·김태석·이한복·최규상·이태익 등이 일가를 이루었다. 한편, 한글 서예에서는 남궁억·장지연·윤백영·이철경·김충현 등이, 문인화에서는 민영익·김응원·안중식·서병오·김규진·이도영·이한복·황용하·지창한 등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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