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3. 해방 후의 서단과 서예 동향
  • 서예 동향
이승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서울에서는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약칭 문건(文建)]가 조직되고, 그 아래로 각 분야별 건설본부가 생겨 미술 단체로는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조직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중앙위원장에 고희동(高羲東), 서기장에 정현웅(鄭玄雄)을 선출하여 1945년 10월 20일부터 10일간 ‘해방기념 문화축전미술전’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도 좌우익 단체로 분열되면서 미술건설본부는 해체되고, 좌익계는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우익계에서는 1946년 1월에 ‘조선미술협회’를 창립하였다.

1945년 9월에는 처음으로 서예인들만의 단체인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가 손재형의 주도로 결성되어, 고문으로 오세창·안종원·고희동 등이 추대되었으며 많은 서예인들이 동참하였다. 이때 회장을 맡은 손재형은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에 ‘서예(書藝)’라는 용어를 쓰자고 제안한 이후, 서예는 일반화된 용어가 되어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와는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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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덕수궁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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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연회는 1946년 8월 ‘해방전람회’라는 이름으로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회원전을 개최하였는데, 출품작가로는 오세창·안종 원·김용진 등의 원로들을 비롯하여 손재형·이상범·노수현·어유종·이용우·변관식·최석우·박승무·배렴·이응로·김영기·이건식·송치헌·오일영·김기승·조병준·황용하·이기우·원충희 등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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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석목단(石牧丹)>
김용진, <석목단(石牧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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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회원전은 1947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참가한 서예가 중에는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해방을 맞은 서예가로 근대와 현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여 국전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던 김용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의 글씨는 안진경체의 해서와 한예(漢隷)에 바탕을 둔 예서 및 고격한 행서를 주로 썼으며, 그림은 매·난·국·죽의 사군자와 수선화·모란·등꽃·연꽃·장미 등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문인화 화법은 근대 중국 문인화의 거장인 오창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에서는 민영익의 필법과 감화를 반영하고 있다. 사대부 출신의 서화가로 품격 높은 문인화의 화제에서 더욱 문채가 났다.

같은 해 2월에는 우익계 문화단체의 총연합단체로서 문총(文總)이 창립되었고, 이후 8월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민족문화 발전의 일환으로 이전의 단체들을 정비하여 1948년 9월 ‘대한미술협회’가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 실시된 서예교육에 관한 공교육은 문교부의 교육과정에서 초·중·고등학교의 미술과목에 들어 있었으나 충실히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다만, 서예교육은 개인적인 서숙을 통해 근대의 서예가를 잇는 세대 교체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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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형, <이충무공시>
손재형, <이충무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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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을 통한 활동이 활발하였던 김돈희계의 손재형·정현복, 김규진계의 이병직, 김태석계의 정해창이 스승의 뒤를 이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서단에 크게 영향을 미친 서예가는 손재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한학과 서법을 익혔으며, 1938년 북경으로 가 중국 금석학자 나진옥에게 금석학에 대한 지식을 얻고, 전적을 입수하여 금문에 대한 식견을 넓혔으며, 황정견의 해서·행서체와 여러 비문의 예서·전서를 바탕으로 한 소전체(素荃體)를 창안하였다.

손재형은 협전과 선전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여 1924년 제3회 선전에서 예서로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써서 첫 입선을 하였고, 거듭 입선을 한 이후 제10회 선전에서는 특선을 하였으며, 1932년 선전에서 분리해 독립한 제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을 하였고, 제2회조선서도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1934년 제13회 서화협회전 입선, 1935년 제14회 서화협회전에는 회원으로 출품하였다.

해방 후에는 제1회(1949) 국전부터 제9회(1960)까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뒤 고문(1961)·심사위원장(1964)을 역임하며 국전을 통해서 현대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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