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3. 해방 후의 서단과 서예 동향
  •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체
이승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문화예술계도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여 대한미술협회를 탄생시켰다. 대한미술협회는 대한민국미 술전람회(일명 국전)를 경복궁 전시장(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949년 11월 21일∼12월 11일까지 개최하였다. 이어서 국전은 1981년까지 30회에 이르는 동안 한국서단의 중추가 되는 서예가들을 많이 배출시켜 한국 현대 서예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역할을 훌륭하게 할 수 있었다.

제1회 국전은 해방 후 최대 규모의 국가적인 미술전람회로 문화계와 일반인의 관심이 컸으며,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라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서예 부문 출품작은 129점이었는데, 그 중 입선작은 35점이었다. 심사위원은 안종원·김용진·손재형이었으며, 김기승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제2회 국전은 6·25전쟁으로 인하여 1953년 11월 개최되었으나 서예 부분 출품작은 32점이었으며 24점이 입선되었다. 김기승이 제1회에 이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제3회에서는 최중길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제4회 때부터는 초대작가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당시 초대작가로 선정된 서예가로는 김충현·배길기·이병직·손재형·안치헌 등 5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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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국전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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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은 대한미술협회의 회장으로 10년 간 역임하다가 1955년 6월 총회에서 회장이 도상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국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협회에 서예계에서는 손재형이 주동이 되어 서예인들을 대거 참여하게 하였다.

제8회(1959) 국전에서는 초대작가 수가 늘어나 김용진·배길기·황용하·손재형·김충현·임청·오일영·송치헌·이병직·김기승·정현복·유희강·최현주·정환섭 12명이었고, 추천작가는 현중화·김희순·이경배·구철우 등 4명이었다.

국전은 회를 거듭할수록 초대작가와 추천작가가 늘어나 중견작가층이 두터워졌으며, 신인작가의 등용문 역할 을 하면서 서예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서예 인구가 점점 늘어나 출품작도 아울러 증가하게 되었다. 제17회 국전에서는 서희환(徐喜渙, 1934∼1995)의 한글전서 <애국시>가 국전사상 처음으로 서예부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서예계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이렇듯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는 국전이 서단활동의 유일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출품자가 많아, 입상을 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자 특정 심사위원의 서풍을 추종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손재형은 제9회(1960)까지 심사위원을 계속 연임하였고, 제10회(1961)부터 제12회까지는 고문, 제13회에서는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여 국전의 서풍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나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국전에 출품한 작품의 서체 종류를 보면, 한글서예에 있어서는 초기에 궁체정자가 많았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흘림의 선호가 매우 높아져서 제18회 이후에는 흘림이 90∼100%를 차지하였다. 심지어 마지막 제30회에서는 총 출품작 27점 중 정자는 한 점도 없고, 27점 모두 흘림에 치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문서예에서는 각 서체별로 차지하는 비율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전서를 보면 초기에는 2∼3점에 불과하였으나 제13회 이후부터 비율이 상승하여 제30회에는 24점에 이르렀다. 예서는 초기에는 1점으로 출품작이 적었으나 제10회 이후 서서히 상승하여 평균 25%의 비율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해서는 초기에서 중기까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후기에 점차 떨어졌다. 그러나 행서는 점점 출품작이 많아져 5체 중 차지하는 비율이 35%를 넘어가기도 하였으며, 초서는 초기에 1∼2점이던 출품작이 후기로 갈수록 상승하였으나 12% 정도였다. 이와 같이 국전을 통해 한문서체의 선호도를 보면, 초기에는 해서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으나 중기를 지나면서 전·예서와 행·초서의 비율이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서 예를 실용성보다 조형성이나 예술성에 입각하여 표현하려는 인식의 변화에서 온 결과로, 법첩에 의한 체계적인 학습이 충실히 이루어져 다양한 서체의 표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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