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3. 해방 후의 서단과 서예 동향
  • 1960년대의 서예 현황과 유행 서풍
이승연

국전을 비롯한 공모전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 시기에는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58년 이철경과 동생 이미경(李美卿, 1918∼)에 의해 ‘갈물한글서회’가 결성되어 한글궁체 보급을 확산시켰다. 이후 손재형이 시도한 한글의 전·예체화와 김충현에 의한 고체가 탄생하였고, 제17회 국전에서는 한글 서예가 대통령상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한글 서예의 활성화는 해방 이후 한글 전용 정책과 맞물려 한글 궁체와 고체가 많이 쓰여졌으며, 한글의 초서화인 진흘림 또한 윤백영에 의해 그 면모를 드러내며 선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궁체와 고체의 유행은 해방 이후 간행된 한글교재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36년 간 잃어버렸던 우리 문화를 되찾기 위한 민족적인 바람에서 더더욱 간절히 이루어졌다. 김충현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궁체를 바탕으로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하여, 해방이 되자마자 바로 『우리 글씨체』(1945)·『중등 글씨체』(1946)를 저술하여 한글 글씨 보급에 앞장섰다.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이었던 최현배(崔鉉培, 1894∼1970)는 한글 글씨본의 편찬을 이철경에게 의뢰하여 『초등글씨본』(1946)1·2·3권과 『중등글씨본』 1·2·3권이 궁체로 쓰여져 나왔는데, 이 책들은 한글 궁체 보급의 기틀이 되었다.

더욱이 김충현은 제1회 국전에서 한글 궁체작품 <고시조>를 출 품하였으며, 훈민정음을 위시하여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 등 고판본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전·예서의 장법으로 표현한 고체를 창안하여 한글 서예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이후 이 서체는 김응현·이기우·김진상 등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하생들의 모임인 열상서단(洌上書壇)에서 신두영 등에 의해 현대 미감에 맞게 변형되어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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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경, <관동별곡> 중 일부
이철경, <관동별곡>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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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글을 한문의 전서와 예서 필법으로 작품화한 또 다른 서예가는 손재형으로, 1951년 <이충무공동상명문(李忠武公銅像銘文)>을 한글로 발표하였으며, 그의 제자 서희환 등에 의해 한글판본의 작품화가 계승 발전되었다.

이후 김기승은 황정견의 <송풍각시(松風閣詩)>에서 보이는 기필(起筆)을 강하게 하여 리듬있게 쓴 필획의 점두법(點頭法)으로 원곡풍의 장법을 완성시켰으며, 특이한 조형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호하는 서풍이 되기도 하였다.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궁녀들이 편지나 책을 베낄 때 쓰던 서체로 정자체, 반흘림, 진흘림으로 나뉘어진다. 이러한 한글 서예의 보급에 앞장선 단체로는 ‘갈물한글연구회’와 ‘산돌한글연구회’ 등이 있으며, 이들 단체에 속한 서예가들은 정자와 반흘림의 다양한 표현과 격조 높은 서격(書格)으로 한글 서예의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특히 진흘림을 잘 표현한 봉서(封書)는 조용선(趙龍善, 1930∼)이 윤백영의 뒤를 계승하여 깊이 연구하고 작품화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예 단체의 결성이 활성화되어, 단체전과 서숙전, 개인전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1956년 원곡 김기승은 대성서예원을 발족하고 1958년 4월 제1회 원곡서예전을 개최하기 시작하여 서예의 저변 확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기승은 중국에서 우우임에서 서법의 영향을 받은 후, 1937년부터는 손재형 문하에서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받아 ‘전국서도전’ 2등 수상, 1946년 제1 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연이어 특선과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여 초대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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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승, <용비어천가>
김기승, <용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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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60년대에는 묵영(墨映)작업을 통해 서예의 영역확장과 본질회귀를 현대 미술어법으로 탐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 양성과 서예전, 개인전을 왕성하게 개최하였다. 그는 이 가운데에도 서예 이론 연구에 천착하여 『한국서예사(韓國書藝史)』·『원곡서문집(原谷書文集)』 등을 저술하여 한국서예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황정견 서풍의 영향으로 한글을 써서 원곡체(原谷體)를 창안하였고, 이를 폰트화하여 대중적으로 보급시켜 간판, 책표지, 성경 등에 많이 쓰이게 하였다.

1962년에는 유희강에 의해 검여서원이 발족되었다. 유희강은 가학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북경에 가서 8년 동안 서화 및 금석학을 배운 후 1946년 귀국하여 인천시립박물관장·인천시립도서관장 등을 역임하면서 서예연구와 후학지도를 위해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8년에는 뇌출혈로 인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좌수서(左手書)로서 작품을 하여 인간승리의 극적인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1953년 제2회 국전에 입선, 제4회에 특선, 제5회와 제6회에 문교부장관상을 받은 이래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다. 두 번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한국서예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현대 서예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전·예·해·행서를 두루 잘 썼으며, 전각과 그림에도 능하였다. 전·예서는 등석여(鄧石如)를 토대로 하였으며, 해·행서는 처음에는 황정견과 유용(劉墉)의 서풍을 섭 렵하다 차차 북위서를 가미하여 웅혼(雄渾)한 기운이 담긴 서풍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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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환, <애국시>
서희환, <애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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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전남 광주에서는 허백련(許白鍊, 1891∼1977)에 의한 광주서도회와 안규동(安圭東, 1907∼1987)에 의한 광주서예연구회가 있었으며, 전북에서는 전주의 송성용에 의한 연묵회와 익산의 최정균에 의한 호남서도회가 있었다. 부산에서는 오제봉에 의한 묘심서도회와 김광업(金廣業, 1906∼1976)에 의한 동명서예원 등이 있어서 서숙을 통한 서예연구와 전시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개인전으로는 1952년 배길기가 부산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후 1955년에는 김충현전, 이기우전, 1958년에 김기승전, 1959년에 유희강전, 철농서예전각전 등이 개최되었다. 이어 1960년대에는 서예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개인전이 차차 늘어나게 되었다.

국내 서예가로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던 배길기는 중국의 오창석·허신(許愼)의 필치와 장법을 익힘과 아울러 오세창에게서는 전서와 전각 영향을 받았다. 이어 안종원으로부터는 예서의 필법을 익혔고, 해서에서는 구양순을 토대로 하였으며, 행·초서에 있어서는 왕희지·안진경·손과정 등의 필의(筆意)를 흡수하였다. 또한, 전각에 있어서는 청대의 여러 전각가들의 인풍(印風)과 일본의 가와이 센교의 인풍을 독자적으로 소화하여 자가풍을 이루었다.

이 당시 전시회 중 괄목할 만한 개인전으로는 고봉주 개인전을 들 수 있다. 그는 1924년에 일본에서 전각을 시작하여 1932년부터 1944년 귀국할 때까지 히하이 덴라이와 가와이 센교에게서 지도를 받아 서예와 전각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서도원 심사위원, 전각서예 전공교수 겸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오사카 등에서 강습회 강사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선생인 히하이 덴라이에게 인정을 받았다. 28세에 서도예술(書道藝術) 동인(同人), 30세에 흥아서도연맹전(興亞書道聯盟展)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일본 신궁의 보물전에 그의 인 장 <강원신궁(橿原神宮)> 음각과 양각 2과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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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강, <무량수불>
유희강, <무량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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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현, <사모곡>
김충현,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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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장을 새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5년 60세에 첫 개인전인 ‘고석봉 전각서예전’을 국립중앙공보관 화랑에서 개최한 후 많은 전시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일 양국의 서예와 전각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글씨는 예서와 전서를 잘 썼다.

이들의 개인전을 통해 당시 유행했던 서풍을 살펴보면, 다시 일기 시작한 비학의 열기로 해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전서로 옮겨가면서 북비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여 양수경의 제자인 마츠모토 호우스이(松本芳翠)와 스치모도 시유우(辻本史邑) 문하에서 직접 북위서를 배우고 귀국한 현중화와 중국에서 8년 유학하여 서예와 금석학을 공부한 유희 강과 김응현의 북위서풍은 한국 서단에 큰 영향을 주어 장맹용비(張猛龍碑)·정희하비·용문20품(龍門二十品)·조상기(造像記)·묘지명(墓誌銘) 등의 서체를 유행하게 하였다. 이어 예서에서는 한예(漢隷)의 팔분서(八分書) 영역에서 진간(秦簡)·한간(漢簡)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서에서는 대전과 소전 외에 갑골·금문·와당문 등이 작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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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길기, <두보시(杜甫詩)>
배길기, <두보시(杜甫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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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는 여초 김응현 서예개인전(12월 10일∼16일), 김재윤(金在潤) 서화전(4월 12일∼19일), 해봉(海峰) 정필선(鄭弼善) 서예전(5월 11일∼15일), 송연회(宋年會) 서예전(5월 29일∼6월 4일), 정재현(鄭宰賢) 서예개인전(7월 23일∼26일), 석봉 고봉주 서도개인전(9월 7일∼13일), 홍석창(洪石蒼) 서화개인전(9월 21일∼27일), 남용(南龍) 김용구(金容九) 서도전(11월 6일∼23일)이 있었다. 이어 지방에서도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개인전(12월),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개인전(10월 29일∼11월 4일), 약산(藥山) 김태주(金兌柱) 서예개인전(11월 5일∼11일), 문기선(文基善) 개인전 등이 개최된 것으로 보아 당시 전문 서예가들의 개인전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체로는 1956년 김충현 등이 중심이 된 동방연서회가 창립되어 서예의 본질과 근원을 밝히고, 고전을 연구하였다.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운동은 동방연서회를 통해 1960년대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회원전과 전국학생 휘호대회, 서화특별강습회를 개최하였고, 동방서예강좌 기초이론편 6권과 계간 『서통(書通)』지를 발간하면서, 한국 금석의 총정리와 서법의 정궤(正軌)를 정리하여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렸다. 또한, 중국서법학회와 결연을 맺어 해외교류전을 개최함으로써 국내의 서예작품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0년 6월에는 난정회(蘭亭會)가 결성되어 배길기·유희강·김기승 등 주요 서가들이 참가하였으나 1회 전시로 그쳤고, 1965년 4월에는 한국서예가협회가 배길기·김충현·민태식·원충희·김응현·홍진표·박세림·박병규·유인식·유희강 등에 의해 발기인으로 57명이 참여하 여 회원전·공모전·서예지 간행 등의 목적을 설정하였으며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있다. 1965년 10월에는 초·중고교 학생 서예교육의 실무자들이 주관하여 대한서예교육회가 결성되었고, 11월에 초·중고 학생 경서대회(競書大會)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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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주, <석인(石印)>
고봉주, <석인(石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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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서예전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김기승은 『원곡서문집』 「1962년 서예백서」에서 “금년도 서예의 공모전, 단체전, 개인전을 엮어보면 ‘제11회 국전서예부’, ‘5·16혁명기념미전서예부’, ‘제5회 동방연서회전’, ‘갈물국문서예원전’, ‘제5회 원곡서숙전’, ‘제5회 원곡서예개인전’ 등 이라고 보겠는데 …… ”라고 하여 당시 점차 개인전과 서숙전 등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는 한문 서예와 더불어 한글 서예도 점차 질적 향상과 함께 저변이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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