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6 서예생활과 문방사우
  • 02. 종이(紙)
김미라

종이는 후한의 채륜(蔡倫)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종이가 제작되었는지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610년 먹과 종이를 잘 만들었다고 하는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제지술을 전수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86) 『日本の工藝』4 紙, 淡交社, 1966, p.183 : 이종석, 「종이」, 『韓國의 傳統工藝』, 1998, pp.165∼172 재인용. 현전하는 유물로는 석가탑에서 나온 닥지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있다.87) 폭 6.5㎝ 길이 7m에 이르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대보기
종이 두루마리
종이 두루마리
팝업창 닫기

신라 경덕왕 14년(755) 때의 문서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 嚴經)>에는 닥나무 껍질을 맷돌로 갈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어, 고대부터 제지에 닥나무를 썼음을 알 수 있다.88) 신라의 기록에는 진덕여왕 원년(648) 종이 연에 관한 기록이 전하고 있어, 종이 사용이 이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닥나무를 주원료로 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중국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확대보기
종이 두루마리
종이 두루마리
팝업창 닫기

이러한 사실은 『담헌서』 외집 권8, 연기(燕記) 「연로기략(沿路記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심양에서 종이 만드는 곳을 구경하였는데 큰 맷돌(石磨)을 설치하여 누런 물을 가득 담아놓고 말 3필로 돌을 돌려 갈았다. 다 간 것은 발에다 건져내었는데 우리나라의 제조법과 같았다. 곁에는 벽돌로 양쪽(兩面)으로 벽을 쌓고 벽 가운데는 비었는데 거기에다 석탄불을 피워 양쪽 벽이 마치 온돌방처럼 더워 축축한 종이를 붙이면 잠시 동안에 건조되어 떨어졌는데 이것은 대개 겨울철에 쓰기 위한 것이었다. 종이 원료를 물어 보니 닥나무껍질(楮皮)이라고 한다. 생각건대 중국에서는 갈아서 가루가 되게 하여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질기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가늘게 풀어서 만들기 때문에 털이 생기는 것 같았으니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도 우리나라가 종이 원료도 닥나무 껍질을 재료로 하여 만든다는 말을 듣고 서로 돌아보며 이상하게 여겼다.

물론 귀리나 등나무 혹은 율무와 같은 이색적인 재료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주된 재료는 닥나무였다. 이처럼 중국 역시 같은 닥나무를 재료로 사용하였는데, 우리나라와 종이 질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며, 그 이유는 중국의 것은 닥나무를 갈아서 가루가 되게 하기 때문에 질기지 않은 반면, 우리나라의 것은 섬유질을 끊지 않아 질기지만 표면이 부스스 일어난다고 한 것이다.89) 중국의 종이기술을 배우기 위한 조선 왕실의 노력들은 세종과 세조 때에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직접 기술을 전수해 오도록 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중국과 우리나라의 제지 기술은 그 방법이나 재료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지 기술 고양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고려 종이로 쓴 글씨
고려 종이로 쓴 글씨
팝업창 닫기

문사들이 사용할 종이는 자신의 뜻에 맞는 붓과 합일되는 것으로 글을 쓰는 문인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종이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이 말하는 당대 즐겨 사용하였던 종이의 종류나 특징은 아쉽게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 종이에 관한 단편적인 평들만이 전할 뿐이다.

중국에서 고려지(高麗紙)는 부드럽고, 매끈한 종이를 가리키는 백추지(白硾紙)·견지(繭紙)라고 기록하였고, 『원사(元史)』를 편찬할 때 표의(表衣)에 고려의 취지(翠紙)를 사용하였다거나 명사들이 고려지를 사용하였다는 기록들이 있음을 볼 때 우리 종이가 훌륭하였음을 알 수 있다.90) 송나라 조희곡이 지은 『洞天淸錄』에 의하면, “고려지라는 것은 면견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며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이종석, 「종이」, 『韓國의 傳統工藝』, 1998. pp.165∼172). 또 이 논고에서는 본문의 ‘고려의 취지’라는 것을 고려 때 금은자의 사경에 즐겨 사용하였던 아청색의 쪽물 들인 종이로 추측한다. 고려지가 어찌나 매끄럽고 고운지 중국에서는 이를 누에고치로 만든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나중에 이것이 닥나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려의 제지기술이 매우 우수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조선시대 기록들에는 우리 종이가 조질이라는 지적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실질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91) 『북학의』 內篇, 紙에 “종이는 먹을 잘 받아야 글씨 쓰기나 그림 그리기에 적당하고 좋은 것이다. 찢어지지 않는 것만으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종이가 천하에서 제일이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에는 종이를 뜨는 簾에 일정한 치수가 없다. 그러므로 책 종이를 절단할 때 半截하면 너무 커서 나머지는 모두 끊어 버려야 하고, 三截하면 너무 짧아서 글자 밑이 없어지는 폐단이 있다. 또 八道 종이의 長短이 모두 같지 않아서, 이 때문에 허비하는 종이가 얼마인지 모른다. 종이는 반드시 書冊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표준으로 하고 길이를 맞추어서 만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불경이나 사서(史書) 등 국가적 사업이 늘고 다양한 용도의 종이 사용 증가와 더불어 청에 보낼 엄청난 양의 조공 부담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종이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고려시대부터 지장(紙匠)으로 분리되어 봉급을 받았으며, 조선시대는 대량의 종이 조달을 위해서 많은 지장들이 국가에 귀속되었다.92) 『고려사』 권78, 지32, 식화1 전제 녹과전, “향교 소속의 지장, 墨尺(먹을 만드는 장인), 水汲(물을 깃는 관청의 여자 종), 刀尺(희생동물을 도살하는 자) 등의 位田은 전례대로 떼어 준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르면 종이를 대량 생산하게 된다. 태종 16년(1415) 조지소가 설치되었고, 提調 2명, 司紙 1명, 別提 4명을 두어 기술 관계를 하며, 지장 85명에 잡역부 95명이 배치되어 있다. 각 도에도 638명의 지장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 이후 조선 초기까지는 그들에 대한 처우에 국가가 그리 소홀하지 않으려 하였던 기록들도 보인다.93) 『고려사』 권80, 지34, 식화3 녹봉. 모두 300일 이상 복무한 자들에게 주기로 하며 문종 30년에 제정하기를 ‘중상서의 紙匠 행주부위 1명 벼 12섬’으로 그림을 지도하는 畵業指諭가 쌀 15섬을 받아 가장 많은 것에 비해서는 적었으나 다른 공장에 비해서는 해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게 말하면, 닥나무 껍질을 삶고 표백한 후,94) 『세조실록』의 세조 3년(1459)에 저피 표백제로 木灰 잿물을 사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찧고 빻아서는 닥풀을 섞어 저어 발로 떠내어 한 장씩 말린 것이다. 세종 2년 지금의 세검정에 조지서를 두었고 세종 연 간 고정지(藁精紙), 유엽지(柳葉紙), 유목지(柳木紙), 의이지(薏苡紙), 순왜지(純倭紙) 등의 종이를 제조하였다.

확대보기
주지각종(周紙各種)
주지각종(周紙各種)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봉투각종(封套各種)
봉투각종(封套各種)
팝업창 닫기

『산림경제』, 『거가필용』, 『임원십육지』 등에 기재되어 있는 종이를 말리는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그 작업이 매우 고되고 긴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보여준다.

마른 종이 10장에 물을 뿌려서 적신 습지 1장 위에 합쳐 놓는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몇 겹을 반복해 쌓아 올린다. 100장이 되면 한 묶음으로 하여 판 위에 놓고 그 위에 평평한 널빤지를 올려 좋은 다음 큰 돌을 눌러 놓는다. 하루 정도 지나면 아래위로 고르게 습기가 스며든다. 이것을 큰 도침용 망치로 고르게 200∼300번 두드리면 밑의 종이가 밀착되면서 100장 중 절반인 50장 정도는 마르고 50장 정도는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면 다시 마른 것과 습기가 있는 것을 섞어서 겹쳐 쌓아 놓고 또 다시 200∼300번 두드린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한 반나절 그늘에 말렸다가 다시 겹쳐 놓고 3∼4번 두드리면 모두 마르게 된다. 이렇게 한 후에 종이의 끈기를 보아서 다시 다듬이 돌에 놓고 3∼5번 고르게 두드리면 빛나 고 반질반질한 것이 기름종이와 거의 비슷하게 된다. 이 방법은 오로지 종이를 두드리고 서로 바꾸어 가면서 섞어 놓는 공들임에 달려 있으며 최고의 기술은 손으로 익숙해지는 방법뿐이다.

우리나라 종이의 이름은 『세종실록지리지』, 『대전회통』, 『한양가』, 『임원십육지』, 조지서의 기록 등과 일본인이 조사한 총독부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서로 다르고 그 종류도 다양해서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렵다.

다만, 열거된 이름들 중 갑의지(甲衣紙)라든지 표지(表紙), 선자지(扇子紙), 시축지(詩軸紙)같이 사용 용도를 알려주는 종이도 있고, 설화지(雪花紙), 능화지(菱花紙)처럼 문양이 들어 있는 종이로 추측되는 것도 있다. 또한, 고정지, 유엽지처럼 귀리, 혹은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특수한 재료의 것이나 닥나무로 만든 저와지(楮渦紙)를 비롯해서 뽕나무로 만든 상지(桑紙), 이끼를 섞은 백태지(白苔紙), 소나무 껍질로 만든 송피지(松皮紙), 율무를 원료로 한 의이지(薏苡紙), 마를 재료로 한 마골지(麻骨紙), 목화를 사용한 백면지(白綿紙), 갈대로 만든 노화지(蘆花紙) 등이 있었다.

종이를 염색하는 방법으로, 홍람의 즙이나 소방목, 아청색의 전, 울금 등이 사용된다. 『임원경제지』에는 사용 방법을 전하고 있어,95) 김삼대자, 「문방제구」, 『조선시대 문방제구』, 국립중앙박물관, 1992, p.178 참조. 당시 종이 이름들과 염색법에 관한 일부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종이의 쓰임새는 책을 만들기 위한 인쇄를 비롯해서, 도배나 창호와 같은 건축자재, 부채, 탈, 지갑(紙甲),96) 지갑은 방한용으로 사용하였던 옷 종류였던 것으로 본다(김삼기, 「종이」, 『나무와 종이』, 국립민속박물관). 한편, 『세종실록』에 의하면 종이를 접어 미늘을 만들고 녹피로 엮어 만들어 검은 칠을 한 것을 지갑이라 하며, 이것은 용도에 따라 홍색, 황색, 청색의 물을 들이고 마지막으로 겉은 검은 칠로 마감을 하였다. 만들기 편하고 무겁지 않아 입기도 편리하다는 기록이 전한다. 물론 지갑이 호신구로서 역할이 어려워 이에 대한 지적도 있었으나 그 기록이 조선 중기까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에 방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의례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옷, 신발, 물통, 오강, 우산, 장, 롱, 함, 바구니, 망태기 등 생활 소품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또 의식을 위한 종이꽃이나 지전(紙錢) 또한 대량의 종이가 필요하였다. 지전의 사용이 조선 중기까지도 성행하였고,97) 『인조실록』 권10, 3년 10월 기록에 의하면, 태종 때 처음 철전을 쓰게 되고, 이전에는 楮貨를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인조 당시에도 저화가 성행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종이꽃의 경우 화장(花匠)이나 상화농장(牀花籠匠)이라 해서 꽃을 만드는 장인이 경공장에 10명 정도 귀속되어 있을 정 도였다.98) 고종 임인년의 <진연의궤>에 의하면, 내진연과 외진연에 소용된 조화는 모두 무려 45,000여 개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박영선, 「종이」, 『한국민속대계』, 1966).

확대보기
시전지판
시전지판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시전지판
시전지판
팝업창 닫기

이렇게 종이의 쓰임새가 다양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정의 종이 생산에 대한 관심 증대와도 연결된다. 조선시대 들어서 인쇄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자 주자소와 제지소를 설치하게 되어 종이 제조 발달에 힘을 쏟는다. 이전에는 관청에서도 종이를 전담할 공영 제작소를 두지 않다가 1412년 조지소를99) 1466년 조지소를 造紙署로 개칭하였다가 1882년 폐지하였다. 설치하게 되면서부터 종이 생산이 급증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왕실에서는 지장(紙匠) 박비(朴非)를 북경으로 보내 조지법을 배워 오게 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

지의(紙衣)에 사용된 종이는 낙복지(落幅紙)라 하여 과시에서 낙방한 사람의 종이를 썼는데, 과시용 시지는 두껍고 도련과정이 잘된 상품의 종이였다. 지의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낙복지 1.5매가 소요되었다. 또 민간에서 지혜(紙鞋)를 팔기 위해서 사대부가의 서책을 훔쳐내고, 지립(紙笠)을100) 숙종 연간(1674∼1720)에 牛疫이 성하여 소들이 죽게 되자, 戰笠을 지승紙繩으로 엮어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러한 병폐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만들어 쓰기 위해 각사의 관문서와 사부가의 서책을 도둑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101) 『승정원일기』 숙종 9년 9월 2일 및 김삼기, 앞의 논문 재인용. 이러한 예들은 그 만큼 종이 생산의 부족이 있었고, 종이가 질기고 강하여 여러 용도로의 사용이 무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와 아울러 종이에 기름을 발라 유지로 만들어 어용화본을 출초하는 초본으로도 사용하였고, 표문과 전문 등의 외교문서를 담는 자루를 유지로 만들어 썼 다고 한다.102) 『성종실록』 권239, 성종 21년 4월 15일 및 김삼기, 앞의 논문 참조.

확대보기
고비
고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고비
고비
팝업창 닫기

한편, 종이와 관련해서 사랑방에 놓인 문방제구로 고비(考備)가 있다. 조선시대의 연락은 대부분이 편지였다. 이러한 편지들은 고비에 보관해 두었다. 고비는 사랑방의 규모가 커지고 벽에 여유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고비는 간결한 나무 구조로만 만들거나 결이 좋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사군자나 글귀를 조각한 것도 있고, 대나무살로 만들어 조형미를 한껏 뽐낸 것도 있다. 대나무를 잘라 유연하게 곡선으로 만들어 나무못을 고정한 도판의 예는 담백한 느낌의 나무판면으로 만든 것에 비해 장식성이 두드러지는데 남은 유물은 드물다.

다음으로 선비들이 사용하였던 종이와 관련하여 시전지(詩箋紙)를 빼놓을 수 없다. 편지나 시를 전하였던 용도로 사용된 시전지는 색이 들어 있거나 시구와 그림, 글쓰기에 편하도록 목판에 칸을 새겨 찍어서 만든 것들이다. 시전지는 목판이나 종이에 찍힌 형태로 다수 전하고는 있으나 그리 주목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명성황후의 친필 편지와 함께 조선 왕실에서 소장하였던 19세기 이후 시전지들이 다수 소개되면서 아름다운 우리 시전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제기되었다.103) 창덕궁에는 왕실에 사용하기 위해 구입하여 보관하였던 시전지들이 보관되었는데, 이것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된 것들이다(국립고궁박물관, 『명성황후 한글 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 2010 참조). 시전지는 선비 문방사우 가운데 종이와 더불어 글을 남김에 있어 중요한 재료가 되며, 그 안에 담고자 하는 선비적 풍격이 함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시전이라는 명칭은 『동국이상국집』, 『남양선생시집(南洋先生詩集)』, 『급암선생시집(及菴先生詩集)』 등 고려시대 문집에 처음으로 나타난다.104) 손계영,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청말 시전지에 대하여」, 『명성황후 한글 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 국립고궁박물관, 2010. 이후 조선 숙종 3년(1677) 이사안의 상소문 등 여러 곳에서도 시전 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시전지 형태는 시문이 적힌 시전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시전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발간한 『근묵(槿墨)』에 다수의 시전지가 나타나고 있어 이를 통해 15세기 이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확대보기
일지춘매화문판(一枝春梅花文板)
일지춘매화문판(一枝春梅花文板)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시고(詩稿)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시고(詩稿)
팝업창 닫기

시전지는 서간용이라기보다는 시를 담는 종이라는 뜻으로, 긴 편지의 내용을 담거나 색이 담긴 종이를 모두 그 범위에 넣고 있다. 시전지는 마치 죽간처럼 나무쪽을 이어 붙인 형태로 꾸민 예와 규격화된 종이에 시구와 그림 혹은 그림만을 찍은 형태로 구별된다. 그 모두 서예의 풍격과 어울리는 그림이 담겼는데, 전하는 예로는 화분 속에 담긴 매화,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의 화훼문이 대부분이다.105) 국립민속박물관과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9세기 시전지판들의 소재들은 대부분이 사군자를 비롯한 화훼문양이었다. 미인도나 화훼초충도와 같은 새로운 소재들도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소극적이었다. 조선에서는 중국에서 시전지가 상품화되어 대량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구별되어 개인적인 수요에 따른 독창적인 소재의 시전지들이 발달하는 양상을 보였다(고연희, 「조선 후기 시전지의 일상성과 회화성」, 한국학특성 학술대회: 한국의 일상문화, 2004).

그림의 위치는 줄칸을 둔 판 중앙 혹은 한 부분에 담아 그린 예도 있고, 그림을 작은 도장처럼 각하여 찍어낸 경우와 줄칸이 생략된 경우는 시전지 전면에 가득 차게 찍은 경우도 있다. 시전지 판에 찍힌 줄칸과 그림은 실용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내용에 걸 맞는 마음의 간곡한 전달이기도 하였다.

얼마 전 소개된 조선 왕실 소장의 시전지는106) 국립고궁박물관, 앞의 책, 2010. 편년이 가능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청 문화의 수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시전지들은 조선 왕실과 각 아문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화훼·동물·고사·고대 청동기·화폐·다기(茶器) 등 꽤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일반에게도 확산되었을 것이다.

다음 도판은 화훼문이 찍힌 조선 왕실 시전지의 한 예로 명성황후의 한글편지이다.107)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 왕실 사용의 시전지 묶음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그 중에 이 시전지와 같은 것이 있어 그 내역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盛號仿古名牋’이라고 적혀 있는 전갑 속에 소장된 시전지와 같은 것들로, 전갑 내의 안내문을 통해 그 유통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금성은 북경에 위치하고 있었던 곳으로 청나라 상점에서 다량 구입된 시전지의 사용 예를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예라고 할 수 있다(손계영, 앞의 논문 참조). 연꽃 위로 나비가 붉은색, 녹색으로 두 마리가 날고 있고, 오른편에는 ‘천화협접심심견(穿花蛺蝶深深見, 연꽃을 파고드는 나비가 깊은 꽃 속에 보인다)’라는 두보의 시구가 적혀 있는데, 여기서 나비는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108) 나비는 80세의 의미로 장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杜甫의 칠언율시 <曲江>의 시에 드러난다고 한다. “술빚은 늘상 가는 곳마다 있거니와/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다네/꽃을 파고드는 나비는 깊은 꽃 속에 보이고/꽁무니로 물질한 잠자리는 천천히 나는구나.”라는 시 속에 나비가 장수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손계영, 앞의 논문, p.436 참조). 이 시전지는 왼편 아래에 ‘전금성(錢錦盛)’이라고 적힌 상점 이름으로 보아 청나라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또 시전지의 사용은 그 담긴 그림과 글의 내용을 부합시켜 보내는 이의 마음을 보다 간곡하게 전달하는 의미도 있고, 명성황후의 편지에서 보듯이 반드시 뜻을 전달한다는 것보다는 단순한 문양과 꾸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5세기 이전부터 종이의 전면에 문양이 도포된 듯이 새겨져 있는 시전지가 17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고, 16세기 초·중반부터 17세기 중·후반까지는 글씨를 쓰기 용이하도록 세로로 죽편(竹片)이 연결된 죽책(竹冊) 문양의 시전지가 유행하였다. 17세기 중반부터는 죽책 문양은 사라지고 종이의 오른편에 작은 문양과 문구가 새겨진 시전지 형태로 변화하여 18세기 후반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19세기 부터는 청나라 시전지의 유입으로 종이의 크기가 작아지고 규격화되면서 화려한 색상의 종이와 다양한 문양의 시전지가 크게 유행하게 된다.109) 손계영, 앞의 논문 참조. 고연희, 앞의 논문에 따르면, 18세기 또 하나의 특징으로 18세기 이후 것에서 다색판화와 작은 크기의 화훼를 주제로 하는 전지의 발달을 들었다.

확대보기
명성황후 한글편지의 편지봉투
명성황후 한글편지의 편지봉투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명성황후 한글편지
명성황후 한글편지
팝업창 닫기

시전지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에는 ‘고간[古簡, 또는 고간(古柬)]’, ‘소초[疏草, 또는 소초(疎艸)]’라는 것이 있는데, ‘고간’은 옛 편지라는 의미이고 ‘소초’는 대충 쓴 글이라는 겸사의 표현이다. 또 ‘일광춘혜 천리면목[一筐春兮千里面目, 또는 일광춘 천리면목(一筐春 千里面目)]’, ‘절매전신[切梅傳信, 또는 매신(梅信)]’, ‘하시일준주 중여세논문(何時一尊酒重與細論文)’ 등도 자주 등장하는 문구이다. ‘일광춘혜 천리면목’이라는 뜻은 ‘한 광주리의 봄이여! 천리 밖에서도 얼굴을 대하는 듯하도다’라는 의미로 봄꽃을 전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글이다. ‘천리면목’만 쓰이면 ‘편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절매전신’이라는 뜻은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는 매화를 꺾어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며, ‘하시일준주 중여세논문’이란 중국 고대의 시 한 구절을 딴 것으로 ‘어느 때나 한 동 이 술을 마시며 다시 더불어 글을 논하겠는가?’라는 표현으로 선비의 풍류가 묻어나는 글귀이다.110) 손계영, 「詩箋紙의 유형과 특징-竹冊型 詩箋紙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23, 2003 참조.

확대보기
조선 왕실의 시전지
조선 왕실의 시전지
팝업창 닫기

이러한 문구들은 선비들의 문기어린 표현이 아닌가 한다. 이후 시전지에 담긴 문양은 이렇게 송신자의 뜻을 담아 보내기도 하고, 앞서 보았듯이 아름다운 꾸밈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문양의 선택은 각자의 선택과 취향에 의해 결정되는데, 현전하는 시전지판들은 대부분 선비적 묵향이 가득한 것들이다.

간혹 시전지가 사사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경우도 찾아 볼 수 있어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도판의 조선 왕실 시전지111) 중국의 天津에 위치하였던 문방사우 전문점이었던 文美齋에서 제작된 시전지이다(국립고궁박물관, 앞의 책 참조). 그림은 청나라 수입품이긴 하나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시전지이다. 한 여성과 아이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채상잠사긴 미제답청혜(採桑蠶事緊未製踏靑鞋, 뽕잎 따고 누에치는 일을 하건만 푸른 짚신 만들어 신지도 못하네)’라는 문구가 있다.112) 손계영, 앞의 논문, p.438. 이 논문에서 보면, 왼편 상단에서 보이는 잔잔히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아 멀리 있는 남편을 기다리며 고된 노역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인의 고달픈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일상의 시름을 적은 것으로, 대부분의 시전지들과는 다르게 여성이 사용했을 법한 시전지이다.113) 시전지에는 이렇게 일상적인 여인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미인도>를 소재로 한 것도 일부 전한다.

물론 조선시대 선비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시전지들은 앞서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것처럼 청나라 수입품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취향의 독창적인 시전지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본인만이 쓰는 도장형의 그림들이 들어가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전하고 싶은 뜻이 담긴 글귀를 담아 넣기도 한다.

이러한 시전지판들은 직접 그림을 그려 판 것도 있어, 그 높은 취향의 품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또 당시 선비들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을 문집에 담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그만큼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데 있어 신중을 기하였다는 뜻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