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6 서예생활과 문방사우
  • 03. 붓(筆)
김미라

붓은 선비가 글을 쓸 때, 선비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 주어야 할 도구이다. 붓은 필관과 털로 만들어졌는데, 그 털이 뻣뻣한 것인지 부드러운 것인지 가지런하게 잘 매어 졌는지 글씨에 기운을 불어 넣을 수 있는지는 문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붓을 만드는데 있어서는 뾰족한 것, 가지런한 것, 둥근 것, 단단한 것을 4가지 덕으로 삼는다.114) 『고반여사』 참조. 김삼대자, 『우리의 문방제구』, 대인기획, 1996, pp.36∼37 참조. 중국에서는 지필묵연(紙筆墨硯)이 아니라 필묵지연(筆墨紙硯)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 그만큼 붓의 용도가 중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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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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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의 모양은 붓자루[필관, 병죽, 축(軸)]와 초가리[붓촉, 필봉(筆鋒), 호(毫), 수(穗)], 붓뚜껑[초(鞘), 갑죽(匣竹)]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115) 붓자루와, 초가리, 붓뚜껑은 괄호 안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국립중앙과학관, 『겨레과학기술조사연구』Ⅸ-붓과 벼루, 2001, p.5). 필관은 금, 은, 상아, 나전, 나무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이 대나무로 만들었다.116) 『지봉유설』 목용부 기용편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龍鞭으로 붓대를 만든다. 용편은 함경도 바다 속에서 나는데, 나무 종류로서 돌과 같다. 빛은 희고 굳고 곧아서 힘줄과 같으니 실로 기이한 물건이다.”라는 대목이 전한다(김삼대자, 앞의 책, p.42). 붓촉은 토끼, 양, 너구리, 족제비, 돼지, 사슴, 개, 말, 쥐수염, 인모 등으로 만든다. 『고반여사』에 따르면 여러 털 중에서도 토끼털만한 것은 없다고 하여, 토끼털이 가장 좋은 재료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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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관과 자호로 만든 소자영(小紫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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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퇴주축필(明代堆朱軸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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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면, 일단 털을 채취하여 털 고르기 작업을 하고 빗으로 솜털을 벗겨내고는, 기름기를 빼내기 위해 쌀겨를 태운 재를 체로 걸러낸 다음 이것을 털 위에 뿌리고 다리미질을 한다. 기름기가 있으면 털이 부드럽지 않고 먹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다고 한다. 털의 기름기를 뺀 후 다시 빗으로 벗겨 털을 걸러내면서 거꾸로 된 것을 바로 잡고 좋은 털만을 골라서 길이에 따라 긴 것은 심소라 하여 중심털로 하고, 짧은 것은 심소를 감싸도록 한다. 옛 문헌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심소에 쓰이는 것은 보다 힘이 있는 털을 사용하여 털의 종류를 달리 하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

털 고르기 작업은 재차 반복되고, 완성되면 명주실로 그 끝을 묶어 주고 붓끝은 풀을 먹여 상하지 않도록 한 후, 붓자루에 끼우게 된다. 붓자루는 겨울에 구입하여 황토 흙과 쌀겨를 푼 물을 짚으로 골고루 잘 문질러 햇볕에 2∼3개월 정도 건조시켜 습기 없는 곳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한다.117) 붓 제작 공정에 관한 것은 무형문화재 진다리붓 안종선 옹의 계보를 잇고 있는 안명환 기능보유자와 밀양붓을 대표하는 박무영과 김형찬의 계보를 잇고 있는 김용식 기능보유자의 제작 방법을 요약한 것이다(국립중앙과학관, 앞의 책, pp.22∼36 ; 김종태 「필장」, 『무형문화재보고서』 제184호 20, 문화재청, 1990).

중국 문헌들에서는118) 권도홍, 앞의 책, pp.311∼312에서 『문방사고』, 『예주쌍즙』, 위탄의 『필경』, 유공권의 『사인혜필첩』의 예문들 참조. 붓을 제작하는데 있어 가운데부분의 털은 주위에 보다 강한 털로 감싼다든지, 또 붓을 잡았을 때 뒷부분의 털 이 부드러워야 원하는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든지 하는 등의 붓의 털을 고르는데 대한 서술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붓이 먹물에 닿았을 때도 그 털이 고르게 유지되면서 붓 끝이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털만을 골라 길이를 맞추어 가지런히 매야 한다. 이렇게 하여 천 만의 토끼털 중 좋은 털만으로 골라 만들었다고 명성이 높았던 중국의 자호필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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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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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전집』 권8의 잡지(雜識)에는 “조문민(趙文敏, 조맹부)은 용필을 잘하는데 쓰는 붓을 빙 돌려서 변화하는 품이 뜻과 같이 나가는 것이 있을 때는 그 붓을 쪼개어 정호(精毫)를 골라 따로 모았다. 그리하여 붓 세 자루의 정호를 모아 필공에게 주어 한 자루를 매도록 하면 진서, 초서의 크고 작은 글씨를 막론하고 써서 아니 되는 것이 없으며 해가 지나도 망가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19) 권도홍, 앞의 책, p.316 재인용. 곧, 그만큼 붓의 털 매는 작업은 정교하면서도 정성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붓 자체에 관해서 과거 문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적어 놓은 기록은 역시 찾기 어려운 상태여서 그 자세한 특징과 종류는 알 수 없다.120) 완당은 족제비털보다 담비꼬리털이 더 좋다고 붓에 대해 짧은 언급을 한 적은 있으나, 『완당전집』 2권 신관호에게 제1신에 제주시절 위당 신관호에게 붓을 선물하면서 “저는 붓을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따지지 않고 있는 대로 사용하며, 특히 한 가지만 즐겨 쓰지는 않습니다. 이에 조그만 붓 한 자루를 보내드립니다. 이 붓을 보면 극히 얇고 털을 고른 것도 정미하며 거꾸로 막힌 털이나 나쁜 끝이 하나도 없습니다.”하고 한 데에서도 붓 자체에 대한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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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호리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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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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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진나라의 몽염(夢恬)이 만들었다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붓을 사용하였던 기록들이 전하고 있다. 거연필(居延筆)이라 불리는 감숙성 거연 출토의 한나라 붓이 있다. 이 붓은 나무로 된 필관의 끝을 십자로 쪼개고 털을 끼운 후 옻을 칠해 굳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지역 왕광묘에서 후한시대의 붓이 출토되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의창군 다호리에서 5점의 칠기 붓이 발굴된 것이다. 칠기 붓은 붓자루 양쪽에 붓촉이 달려 있어 특이하 다. 붓자루는 가운데와 양끝에 각각 작은 구멍을 뚫어 관통하고 있어 매우 독특한 공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고분벽화 속의 묵서나 벽화그림,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755년 경)을 보면 아름다운 글을 완성하게 한 붓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세필로 금니와 은니로 제작된 사경 등은 당시 붓의 발달을 역시 반증한다.

『동국이상국집』 권1, <붓을 읊다>에 오언절구의 시가 전하는데,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담아 한 글자라도 바른말만 써야 한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뾰족한 옥처럼 생긴 네 모습 / 憶爾抽碧玉

꼿꼿한 절조 한림 속에 뛰어났네 / 孤直挺寒林

찬바람 된 서리에도 꺾이지 않았는데 / 風霜苦不死

도리어 칼날에 베임을 당했구나 / 反見鋒刃侵

누가 독부(나쁜 정치로 인심을 잃은 외로운 임금)의 수단을 가지고 / 誰將獨夫手

비간(온나라 주왕의 숙부로 주왕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처형되었다)의 심장을 잘라 내었느냐 / 刳出比干心

네 억울함을 씻고자 한다면 / 爲汝欲雪憤

마땅히 곧은 말만 써야 되리라 / 當書直言箴

조선시대에는 붓에 관한 기록들이 많다. 곧, 『해동역사』에는 우리나라의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 이웃나라까지 유명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 명대 홍무 연간에 조선의 대모필(玳瑁筆)을 황제가 하사하였다는 기록 등을 유추해 보면, 명나라에 예물로 화려한 붓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121) 족제비털로 만든 붓은 황호필 혹은 낭미필로 불려졌다(손환일, 앞의 책, pp.245∼252).

『증보문헌비고』 권64, 예고11, 제묘 관제묘 조선에, “관공(관우)의 생일에 선조 31년에 숭례문 밖에 관우 향사를 세웠는데, 그곳에서 제를 올리는 장면에서 묘우 앞에 장대를 세우고 두 기를 달고 … 글자를 크게 서까래만한 붓으로 썼는데 …”라는 기록이 있어 다양한 크기의 붓들이 제작되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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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필(毛筆)
모필(毛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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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만드는 재료에 관한 내용으로, 『지봉유설』이나 『목민심서』 기록을 통해 보면, 용편초(龍鞭草)라는 희귀한 재료의 용례나 금관(金管)과 은관(銀管), 반죽관(斑竹管)의 존재를 추측하게 한다. 또한, 주색(硃色), 청색, 자황색, 녹색, 자색과 같은 용도에 따른 붓대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122) 『지봉유설』 권20, 卉木部 草에 “龍鞭草는 함경도 바다 속에서 난다. 그 모양이 굳고 곧으며, 깨끗하고 희어서 마치 옥과 같다. 지금 사람들은 이것을 따다가 붓대를 만든다. 이 물건은 琅玕(아름다운 대나무)의 종류이나 어느 책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중국에는 없었던 듯싶다.” 『芝峯類說』 권12, 文章部 五, 五代詩 韓定辭(당나라 말기의 사람으로 五代에 벼슬한 사람이다)의 시에 “성대한 덕은 은관을 가지고 기술하기에 좋다.”라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梁나라의 元帝는 3가지의 붓을 가지고 있었으니, 충효가 완전한 자의 일은 金管의 붓으로 쓰고 덕행이 순수한 자의 사적은 銀管의 붓으로 쓰고 문장이 넉넉하고 뛰어난 자의 일은 斑竹管의 붓으로 기록한다.”고 한다. 『목민심서』 書 권4, 제7부 禮典 6條 2 제6장 課藝에 “무릇 정부 고관은 쓰는 붓도 각기 다르니 硃色, 청색, 赭黃色, 녹색, 자색으로 하여 각자가 평점하고 끝에 총평을 쓴다.”

그러나 역시 자세한 붓의 이야기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그리 많은 글을 남기면서 어떻게 붓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록하지 않았을까. 혹 김정희처럼 글을 쓰는 자에게 붓은 단지 도구로서, 도구를 탓하며 불평하고 살피는 것은 선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붓을 만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시 천대 받았던 장인들만이 만든 것일까? 예용해의 『인간문화재』는 필장(筆匠)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허다한 과객 가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퉁소를 부는 노인이다 … 반면, 붓장이는 어느 모로나 인기가 없었다. 예외 없이 집도 절도 없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무기력한 꽁생원이며 서당에서는 붓을 맨다는 핑계로 두서너 달을 치근대어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어린 소견에도 ‘붓장이 같다’라는 놀림이나 꾸중이 가장 마음에 언짢았던 생각이 난다. … 필장 안익근(安益根) 씨를 제기동 그의 댁으로 찾아가 뵙고는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양주군 문한(文翰) 집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손재주가 있고 눈썰미가 뛰어나, 서당에 온 붓장이가 붓매는 것을 보며 매어 본 것이 17살, 이럭저럭 60년 동안이나 이 일을 해 온다는 안씨의 모습이 어렸을 때 붓장이의 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123) 이겸노, 『문방사우』, 대원사, 1989, p.54 재인용.

조선 후기부터 계속 많은 고충을 겪어 왔던 우리 장인들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와 아울러 주목되는 점은 안익근이 당시 양주군 문한의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붓을 만드는 일에 문인들도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양녕대군에게 자주 드나들며 붓을 만들어 주었다는 김호생(金好生)은 본래 유생이었고, 이후 이것이 태종에게 발견되어 태종이 필장(筆匠)으로 삼았다고 한다.124) 김삼대자, 『우리의 문방제구』, 대인기획, 재인용. 이렇듯 유생들이 붓을 만드는데 관여한 예들이 전하고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필장 8명을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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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장필통(竹張筆筒)
죽장필통(竹張筆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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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제필통(竹製筆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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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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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과 관련해서 사랑방에는 붓을 꽂거나 걸어 두었던 필통, 붓걸이와 붓을 빠는 필세(筆洗) 등을 두었다. 붓을 담아 두었던 필통은 너비가 50∼60㎝ 정도 되고 높이가 30㎝ 정도였던 우리 전통 책상에 놓일 정도 아담한 크기로 나무와 자기로 많이 만들어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필통을 보면 대나무 통을 갈라 이어 붙이거나 통 자체를 2개에서 5개를 이어 붙여 삼형제 혹은 오형제라 부르는 필통도 있다.

도판의 지통은 필통과 매우 닮았다. 크기만 다를 뿐 흡사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그 만듦새가 매우 훌륭하다. 도판의 지통은 낙동법(烙桐法)을 이용하여125) 오동나무를 인두로 태운 후, 짚으로 문질러 여름에 자라 약한 부분은 떨어지게 하고 겨울에 자란 강한 부분만 남겨 나무결을 보다 선명하게 도드라지게 하는 우리나라 목공예의 고유한 꾸밈 방법이다. 오동나무 결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그 생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형태 이상이다. 아가리부분과 바닥부분은 대나무나 오동나무가 아닌 배나무와 같은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바닥이 쉽게 닳거나 물건을 꽂거나 낼 때 입부분이 상할 것을 미리 고려한 것이다. 또 각을 이루는 나무 이음 부분에는 따로 나무촉을 끼워 이어서 연결을 단단하게 하고 있어 간단한 구조로만 보이지만 그 만듦새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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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통(紙筒)
지통(紙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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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필통 중에는 둥근 대나무를 이용해서 대나무 통 그대로를 필통 몸체로 삼거나 대나무를 갈라서 이어 붙여 꽃 모양으로 제작한 경우도 있으며,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을 한 필통도 있다. 또 작은 붓들을 수십 개 개별 통에 꽂을 수 있도록 구성된 것도 있어 용도에 따라 다양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붓걸이는 네모난 형태의 나무에 붓을 걸어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전하는 예가 많지는 않지만 현대적 감각이 돋보여, 그대로 거는 것만으로도 벽을 채우는 존재감이 부각된다. 벽에 걸었을 때 안정된 느낌의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지며, 위칸과 아래칸의 이단으로 된 것과 일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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