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6 서예생활과 문방사우
  • 04. 먹(墨)
김미라

먹이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중국의 상고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사용하였던 먹은 그을음을 사용하였던 것이 아니라 묵석 혹은 석묵이라는 광물질이었으며, 한나라 때 먹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처음에는 광물질에 칠을 개어 대[竹] 조각에 찍어 사용하였으나 이후 송연(松烟, 소나무 그을음)이나 유연(油煙, 기름의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굳혀 만들었다.126) 김삼대자, 앞의 논문 참조.

고구려 고분벽화 속에는 먹으로 된 묵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먹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아울러 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먹을 전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6세기 <집안 사신총 필신도>에서 주구(主構)가 달린 벼루에 붓을 쓰고 있는 인물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당시 먹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127) 초기에는 석탄 또는 흑연의 일종을 칠에 개어 사용하였던 방법이 한대 이후부터 煙煤로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손환일, 앞의 책, p.274에서 예로 든 6세기 <집안 사신총 필신도>에서 보는 주구가 달린 벼루가 혹 그을음과 아교를 사용한 먹이 아니라 칠을 개어 사용하기 위한 용도였을 가능성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먹의 전래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먹에 대한 관심은 기록을 위해서나 글을 쓰는 문사들에게는 당연하였다.

일본의 쇼소인(正倉院)에는 신라의 먹으로 전하는 유물이 있다.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과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이라는 글이 양각으로 뚜렷하게 새겨진 26㎝ 정도의 배 모양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 이다. 또 중국의 섭원묵췌(涉園墨萃)의 묵보법식 중에 맹주공묵, 순주공묵이라는 삽화를 통한 고려묵에서 보면, 묵에 세밀하게 용 무늬로 장식하거나 형태 자체를 사각이 아닌 곡선의 변형을 주었던 우리 고대 묵의 일면을 볼 수 있다.128) 權度洪, 『문방청완설』, 대원사, 2006,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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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사신총 필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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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양가상묵 신라무가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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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은 무엇보다도 좋은 먹빛을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고반여사』에서 먹은 당장의 미적 효과도 중요하지만 훗날 표구를 했을 때에도 그 아름다움이 유지되어야함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먹은 옅으면 2∼3년 안에 먹빛이 다 빠져버려 신기가 사라지고 먹빛이 짙으면 물에 닿을 경우 금새 번져 더러워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의 먹에 대한 관심은 고려시대의 『파한집(破閑集)』이나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내용에서 먹 제작의 어려움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먹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심의 흔적이 나타나 있다.129) 김삼대자, 앞의 논문, p.188 참조.

중국 당나라 묵장(墨匠)으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정규(李廷珪)의 먹을 만드는 법이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전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나라도 참고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내용은, 그을음을 얻어 내어서는 그을음에 황련과 소목, 침향과, 용 뇌, 사향을 첨가하고, 섞어 굳힐 아교는 누런 소가죽을130) 성종 1년 3월 16일에 “호조에서 진언 내에 행할만한 조건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 바치는 먹은 그 수량이 1백정이면 아교를 만드는 쇠가죽 5∼6장이 되고, 그 한 장의 값이 곡식 10석에 이르는데, 민호에게 독촉하여 징수하니”라 하였다. 우리나라 먹을 만드는데 쇠가죽의 아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건조하여 완성할 때까지의 과정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북경의 고궁박물원에는 이정규(李廷珪)가 만들었다는 먹이 전한다. 먹 표면에는 한림풍월이라 적혀있고, 비단으로 싸여 나무 갑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131) 나무갑에는 ‘宋僧法一珍藏’이라 적고 그 아래에 법일은 발이 넓어 奇物을 얻었는데 먹 길이는 한 홀의 길이와 같고 먹 거죽은 이무기의 등과 같다고 적고 있다(권도흥, 앞의 책, p.276 참조). 이정규의 먹이 이렇게 보관되어 전하는 사실은 그가 만든 먹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132) 權度洪, 앞의 책, 2006, pp.276∼277.

우리나라의 먹은 어떤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 있었을까? “고구려는 송연묵을 당나라에 세공으로 바쳤다.”라는 『철경록(輟耕錄)』의 기록이나 『묵사』의 고려조에 “관서 지방[맹주(猛州), 순주(順州)]에서 생산되었던 먹이 주로 중국에 수출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133) 손환일, 앞의 책, pp.247∼249 및 『해동역사』에서 발췌. 당시 묵의 질이 좋았을 것이다. 『파한집』과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의하면, 맹주(평북 孟山)는 송연으로 만든 먹의 특산지였고 조정에 먹을 공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134) 이인로의 기록에 의하면, 먹을 만드는 데는 상당한 공력이 들었음을 말하고 있다. 묵장의 규모는 경공장에 속한 상의원에 4인이 있으며 외공장에는 충청도 6인, 경상도 8인, 전라도 6인이 있는 정도였다. 또 소동파(蘇東坡, 1036년∼1101)의 글에 고려 묵장 장력강(張力剛)이 거론되어 있는 점에서 중국까지 이름을 낸 묵장이 있었다. 국립청주박물관에는 고려묘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먹이 전하고 있다. 아래부분이 갈려 있고, 먹 집게 집은 흔적이 있어 실제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먹에 대한 관심은 그 조형성이나 꾸밈이 아니라 먹을 갈았을 때의 알맞은 색과 질이었다. 좋은 먹은 빨리 닳지도 않고, 갈아 놓았을 때 쉽게 벼루에 스미지도 않으며, 또 글을 쓰면 오랫동안 먹색이 가시질 않는 것이어야 하였다. 때문에 먹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그을음을 얻는데 주의를 기울였던 듯하다.

『성호사설』 만물문에는 먹을 위한 그을음 채취에 관한 서술이 있는데, 그을음 가마에 다섯 개의 독을 덮어서 멀리까지 날아드는 깨끗한 그을음을 얻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멀리 날아서 만들어진 그을음은 가까이에서 만든 것보다 재가 덜하고 입자가 적기 때문이다. 먹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이 그을음과 함께 아교이며,135) 『산림경제』에 따르면 먹을 만드는 방법 역시 그을음 10근에 아교 4근을 섞어 찧어 만든다고 하였다. 중국의 기록들에서 먹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연매와 아교이며 그 혼합 비율과 더불어 얼마나 정성스럽게 찧는가에 달려 있으며, 향을 내기 위해 사향 등이 사용되었다. 전통적인 연매는 송연과 유연(油煙)이 있고, 유연이 송연보다 나중에 유행하게 된다. 유연은 채종유(菜種油), 호마유(胡麻油), 대두유(大豆油), 면실유(棉實油), 들기름136) 숙종 21년 1월 18일에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들기름(수임유) 2백말(두)을 올리라고 하였다. 판서 이세화가 연석에서 수량이 너무 많아 어렵다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제조하는데 쓰려는 것이다.”라 하였다고 한다. 등의 식물성 기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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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먹색이 자색을 띄는 것이 상품이고 흑색이 그 다음이며, 청색은 그 다음이고, 백색이 가장 하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비교할 수 있고, 명확하게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먹의 예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태이다. 아마도 먹은 소모품이었으며 보관 역시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문헌 속의 단편적인 기록을 보면, 고려부터 우리나라에는 붉은 먹을137) 영조 6년 9월 9일에 舊史는 묵으로 新史는 주색으로 송나라 철종이 썼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의 고려조에 구사와 신사를 묵과 주묵으로 쓰는 것에 대한 의견들을 적고 있다. 사용하였고, 『증보문헌비고』 151권, 전부고11, 공제2 정조 2년에 “조선에 보면 납일에 … 대전에는 화룡묵(畵龍墨)과 대자석연, 중자석연, 소자석연을, 중궁전에는 중자석연과 화룡묵을, 세손궁에는 대자석연, 화룡묵을 납하도록”이라고 적고 있다. 또 같은 책 권173, 교빙고3, 역대조빙3 고려조에 보면, “고종 8년(1221)에 저고여를 보내와서 토산물을 요구하였는데, 수달피 1만령, 가는 명주 3천필, 가는 모시 2천 필, 면자 1만근, 용단묵(龍團墨) 1천정, 붓 2백관, 종이 10만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화룡묵이나 용단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마 용을 모티브로 하여 장식한 특별한 먹이 아닐었을까 한다.

먹과 함께 사랑방에 놓여진 문방구로는 묵갑(墨匣)과 묵상(墨牀)이 있다. 묵갑은 먹을 담아 두었던 상자인데, 주로 오동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피나무, 소나무 등으로 만든 묵갑을 사용하였다. 이 나무들은 묵갑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고 다른 문방가구들에 주로 사용하였던 재료들인데, 특히 오동나무나 느티나무의 경우는 나뭇결이 아름다워 앞면에 주로 사용되었다. 단풍나무나 물푸레나무 역시 작은 함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는데, 이 나무들은 오동나무보다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어 큰 가구 보다는 작은 함 등에 활용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고제의 장옥으로 교룡, 호랑이, 인물들을 그려 넣기도 하는 등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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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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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먹을 갈고 난 후 먹을 얹어 두는 작은 받침인데, 이 역시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다. 『임원경제지』의 기록은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참고하여 인용한 글이 있는가 하면, 『금화경독기』처럼 본인이 직접 쓴 글을 다시 인용해 놓기도 하였다. 묵상에 대한 것은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금화경독기』에 나타난다. 곧, “마노, 상 아, 자기로 만든다. 모든 면에는 계급을 만든다.138) 상의 중앙부를 낮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김삼대자는 실제 전하는 유물은 편편한 것만 전하고 이렇게 층이 있는 것은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먹 갈기를 마친 후에 먹을 갈았던 부분이 낮은 면 위에 오도록 걸쳐 놓는데 이것은 먹즙이 묻어 더럽힐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필격, 필병과 함께 벼루가 놓인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그 일면을 알 수 있다.139) 김삼대자, 앞의 논문, p.199 재인용.

이 외에 먹을 담아 두고 사용하였던 묵호(墨壺)가 있는데, 손바닥에 올릴 정도의 작은 호 형태로 아가리의 입술 부분은 얇고 납작한 원형이다. 일명 편구형이라 부르는 형태와 밑면이 전체 지름과 같고 높이가 편구형보다 높은 형태의 것 등이 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묵호들은 19세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순백의 깨끗한 백자부터 청초한 빛깔로 여백미 넘치는 사실적인 사군자를 그린 것이나 혹은 전체를 청화로 물들인 것 등 다양하게 전하며 깔끔하면서 단정한 곡선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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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묵호(白磁墨壺)
백자묵호(白磁墨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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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묵호와 붓
휴대용 묵호와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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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휴대용 묵호도 있는데 뚜껑이 달려 먹물을 보관할 수 있게 하고, 이어서 붓통도 함께 붙여 실용적이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집필하면서 새롭고 놀라운 서양문물을 정신없이 기록하거나 흥이 난 감정을 그대로 실감나게 적어 내려갔던 장면들을 생각하면, 연행이나 유람기를 적을 때 이 도구는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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