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6 서예생활과 문방사우
  • 05. 벼루(硯)
김미라

벼루는 문방사우 중에서도 전하는 수가 가장 많고 다양해서 형태와 종류, 산지와 재료 등에 관한 여러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또한, 벼루는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만큼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방도구이기도 하여 명연은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벼루는 조선시대 책상인 경상(經床)이나 서안(書案) 옆에 먹, 문진 등과 함께 연상 혹은 상자형의 연갑에 보관되었다. 선비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좋은 벼루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자석연을 보고 탐을 내어 몰래 집에 가져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는 시 구절이나 성현(成俔, 1439∼1504)이 자석산을 지나면서 그 돌의 아름다움에 절절하게 탄복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다. 『경도잡지(京都雜誌)』를 쓴 유득공은 평양을 유람하다가 발견한 좋은 벼루 돌을 찾고는 직접 벼루를 제작하였다는 구절도 있어 흥미롭다.140) 김삼대자, 앞의 논문, pp.194∼196 참조.

북송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지은 「단계연명(端溪硯銘)」에 “천 사람이 등불을 켜들어 물을 퍼내고, 백 사람이 피땀 흘려 파 올 린 것이 한 근도 못 되는 이 보연(寶硯)인지라. 이 노고를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나만이 이 돌을 애인같이 품고 자노라.”라는 구절이 전하는 것을 봐도 역시 좋은 벼루를 얻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벼루 하나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던 것은 이렇듯 쉽게 구하지 못하는 물품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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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칠연갑(黑漆硯匣)
흑칠연갑(黑漆硯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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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는 인생의 중요한 목표가 되는 학업 성취를 위해서 선비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전 선비박물관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의 일필휘지의 금분 글씨가 빛나는 연갑이 소장되어 있다. 겉에는 ‘임지청흥(臨池淸興)’이라는 글이 있고,141) ‘臨池淸興’은 벼루를 대하니 맑은 기운이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안쪽에는 “글을 쓰기 위해 방심해서도 너무 예쁘게 쓰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적혀있다.

이는 벼루를 사용할 많은 후학들에게 권계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사용하였던 많은 후학들에게 그 벼루는 스승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142) 김미라, 『우리 목가구의 멋』, 보림출판사, 2007 참조. 비단 벼루뿐 아니라 선비들 방에 놓인 문방제구에는 각별한 의미를 내포한 예들이 있다.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집안에 아직까지 전하는 죽문경상(竹文經床)의 배면(背面)에 음각된 글을 보면, 선조에 대한 깊은 존경과 그 뜻을 잇고자 하는 후손의 경건한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그 가치를 격상시키고 있다.143) 경상의 배면에는 음각으로 7행의 이만부(1664∼1732, 풍산 류씨 집안의 사위)가 쓴 글이 적혀 있다. 그 일부분을 보면, ‘서애 선생의 대나무 서궤는 수암(류성룡의 아들 류진)에게 또 빙군 선생(류성룡의 증손으로 이만부의 장인인 류천지)에게 전해졌으니, 이는 대개 풍산 류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온 구물이다. 내가 이 집안에 장가든 뒤에는 벗 류여상 군(류천지의 아들)이 내가 고서를 읽고 옛 것을 좋아한다 하여, 그것을 나에게 증여하였다. 무릇 물건이 오래되면 보배가 된다. 하물며 류문충공(류성룡)께서 천지의 사업을 경영하고 고금의 학문을 관통한 바탕을 모두 이 서궤 위에서 얻으셨으니 이 서궤에 대해서는 더욱 감격할 만하고 분발할 만하다.’라는 내용이다. 경상에 담긴 의미와 선조의 뜻을 기리고자하는 후손의 마음이 담겨 있다(국립중앙박물관,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 2007, p.98).

다음의 시에서 벼루에 대한 문인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벼루야 벼루야 / 硯乎硯乎

네가 작다 하여 너의 수치가 아니다 / 爾麽非爾之恥

네 비록 한 치쯤 파인돌이지만 / 爾雖一寸窪

나의 무궁한 뜻을 쓰게 한다 / 寫我無盡意

나는 비록 육척 장신인 데도 / 吾雖六尺長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 / 事業借汝遂

벼루야, 너는 나와 같이 / 硯乎吾與汝同歸

생사를 함께 하자꾸나 / 生由是死由是.144)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19, 명 「小硯에 대한 銘」: 김삼대자, 앞의 논문, p.193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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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연산도(黃山硯山圖)
황산연산도(黃山硯山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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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를 사랑하였던 마음은 김정희(金正喜)의 연산도(硯山圖)에서도 보인다. 연산도라는 것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 모양의 연산을 그린 것으로 중국 한대(漢代)의 12개의 봉우리를 가진 도자기 벼루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용이라기보다 감상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이 추사 김정희의 그림을 본 따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 속의 벼루 모습은 그림과 함께 이어진 기록들을 보지 않는다면, 벼루라기보다는 험준한 상상 속의 산을 보는 듯하다. 문인들 방의 인테리어를 언급하였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의 「궤탑문구(几榻文具)」 부분을 보면 당시 괴석에 대한 취미를 엿 볼 수 있다. 즉, 감상용으로서의 괴석을 닮은 벼 루를 사랑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문인들은 산수화를 벽에 걸고 산수화 문양이 든 필통이나 필가(筆架)와 같은 문방구들을 사용하였으며, 손에 들었던 부채 안에도 산수그림이 가득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벗삼았던 선비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산수의 아름다움이 아끼는 벼루에 투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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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연재연보(三硯齋硯譜)
삼연재연보(三硯齋硯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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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벼루에 대한 사랑을 더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현전하는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의 벼루 그림이다. 이 벼루는 그 발문에서 출처를 밝히고 있다.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을 거쳐 김정희가 소장하게 되었던 벼루라고 한다. 이후 이 벼루는 박영철(朴榮喆, 1879∼1939)에게 넘겨져 이한복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김정희의 스승이었던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145) 옹방강은 청나라 경학, 금석학의 대가였으며 대수장가이자 감식안으로 1810년 1월, 78세로 25세의 김정희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일컬었다. 이후 그들은 학문을 지속적으로 교유했으며 김정희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사용하였던 벼루라는 것은 김정희에게는 매우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류성룡 경상에서처럼, 그것을 썼던 사용자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 그리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벼루는 글을 쓰는 필기도구로, 또 감상을 위한 그림으로, 때로는 소유자의 학식과 인품을 전하는 귀한 유물로 받아들여졌다.

벼루의 시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정확한 시기를 짚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한대(漢代)에 처음으로 ‘연(硯)’자를 기록하였고, 출토 벼루 또한 전한다고 한다.146) 權度洪, 『문방청완설』, 대원사, 2006에 의하면 “호북성의 옛 초나라가 있었던 자리 雲夢이라는 곳과 진나라 묘에서 돌벼루가 출토되고, 또 섬서성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지금으로부터 6천년이 넘은 시대의 돌벼루라 보이는 돌절구가 출토되었다.”고 하여, 벼루의 시원을 높이 올려 보기도 한다. 대륙에서는 석재 벼루 외에 개와(蓋瓦)나 징니연(澄泥硯)이147) 징니연은 명나라 문헌을 인용하여 『성호사설』에서 “絳縣에서 만드는 징니연은 비단 주머니를 꿰매서 콸콸 흐르는 물속에 묻어 두었다가 한 해를 넘긴 후에 파 내면 고운 진흙과 모래가 주머니에 꽉 담겨져 있다. 이것을 구워서 벼루를 만들면 물이 잦아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와를 벼루로 사용하였던 것이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되며, 다양한 석재와 동, 죽, 노(蘆), 칠, 파려(유리 또는 수정), 옥, 도와(陶瓦), 동철(銅鐵) 등으로도 벼루를 만들 수 있다고 전하지만 징니연을 사용한 흔적은 없다.148) 『五洲衍文長箋散稿』의 「硯材辨證說」과 「古瓦澄泥二硯辨證說」 등의 문헌자료를 토대로 밝혀진 것이다(김삼대자,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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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陶硯)
도연(陶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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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톱니문 풍자연
고려 톱니문 풍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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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벼루의 시작은 가야와 삼국의 도연(陶硯), 토제연(土製硯), 석연(石硯)에서149) 손환일, 『한국의 벼루』, 서화미디어, 2010, p.16. 볼 수 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심칠연(木心漆硯)이 있다. 고려시대에 오면 ‘풍(風)’자 형태의 풍자연이 대표적이다.150) 米芾, 『硯史』 중에 「고려연」의 대목을 살피면, “고려연은 벼루의 결이 단단하면서도 치밀하며, 소리가 난다. 먹을 갈면 색깔이 푸르게 되며, 간간이 흰색의 金星이 있어서 돌의 가로무늬를 따라서 촘촘하게 줄을 이루고 있는데, 오래 쓰면 무늬가 없어진다.”라고 적고 있다(손환일, 앞의 책 재인용). 고려시대 벼루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석제용두장식방형연(石製龍頭裝飾方形硯),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청자상감 국모란문신축명연(靑磁象嵌菊牧丹文辛丑銘硯, 보물 제1382호) 등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벼루는151) 『五洲衍文長箋散稿』 「硯材辨證說」, 『林園十六志』 「東國硯品」, 성해응(1760∼1839) 『硏經齋全集』에 당시 벼루 기록을 살필 수 있다. 석연의 종류가 무수하게 발달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남포석(藍浦石)이라 불리는 보령의 까만 오석에 관해 모두들 칭찬에 마지 않았다.152) 이유원(1814∼1888)의 『林下筆記』에는 중국 북경의 벼슬아치들이 남포석을 구하려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서유구와 성해응에 따르면 금성문과 금사문, 은사문이 있는 남포석을 제일이라고 한다. 또 조각이 아름다워 화초석이라고도 불리는 위원 화초석(渭原花草石)이 있는데, 이것은 평안북도의 위원에서 나는 벼루이다. 벼루의 조각은 영조 때 석치(石痴) 정철조(鄭喆祚, 1730∼1781)라는153) 유득공의 『동연보』에는 단순한 방형벼루에서 각종의 문양을 조각하여 예술품화한 사람은 정철조라 적고 있다. 손환일, 앞의 책에 의하면 정철조는 문과에 급제한 문인이었고, 홍대용,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어울렸던 실학자였다고 한다. 인물에 의해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는 석치라는 호에서도 보듯이 돌에 미쳐 돌을 보면 특별한 도구 없이도 아름다운 조각을 하는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사람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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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화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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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곡폭포산수연(幽谷瀑布山水硯)
유곡폭포산수연(幽谷瀑布山水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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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자석연(紫石硯)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이미 사랑받고 있었던 벼루로 진천과 단양의 자석연은 매우 유명하였다고 한다. 벼루는 종이나 붓과 다르게 신하에게 하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만약 하사하는 경우에도 다른 물품에 비하여 숫자 또한 적었는데, 국가적인 행사나154) 『증보문헌비고』 권151, 전부고11, 공제2에 “정조 2년 조선에는 납일에 … 대전에는 화룡묵과 대자석연, 중자석연, 소자석연을, 중궁전에는 중자석연과 화룡묵을 세손궁에는 대자석연, 화룡묵을 납하도록”이라고 하고 있다. 왕의 하사품에는 역시 자석연이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자석연은 우리나라 명물로서 중요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곡폭포산수연(幽谷瀑布山水硯)>은 조선 중기의 문인 이여(李畬, 1645∼1718)가 사용하였던 남포석의 벼루이다. 이여는 1710년(숙종 36)에 영의정까지 올랐던 재상으로 당시 손재주가 좋았던 명인(名人)이 제작하였다는 것과 제작 시기가 명확한 유물로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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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적
청자 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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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진사 채도형 연적(白磁靑華辰砂彩桃形硯滴)
백자청화진사 채도형 연적(白磁靑華辰砂彩桃形硯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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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벼루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으로 벼루를 보관하는 방법이 명나라 때 편찬된 『고반여사(拷槃餘事)』에 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선비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사용한 벼루는 바로 씻어 주어야 하고 연지(硯池)에는 물을 담아 두지만 먹을 가는 곳에는 물을 말려두어야 하고, 끓인 물로 닦아서는 안 되고, 모전(毛氈)조각이나 헝겊, 헌종이로 문지르면 부스러기가 떨어지니 금해야 하고, 조각(皁角)이나 사과(絲瓜)대, 반하(半夏)조각, 연방(蓮房)껍질로 씻으면 때를 벗기고 벼루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55) 김삼대자, 앞의 논문, p.192. 같은 책에, 또 붓은 사용하다가 버려지게 되면 그냥 버리지 않고 땅에 묻는다고 하였는데, 당시는 문방용품을 쓰다가 흔히 잃어버리거나 쉽게 새것으로 교환하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던 시대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벼루 옆에 놓이는 문방구로 연적을 빼 놓을 수 없다.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어 하나는 물을 따르게 되어 있고 하나는 손가락으로 막아서 물의 양을 조절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연적은 은, 동, 유, 자기로 만들었는데, 특히 자기로 만든 연적이 19세기 이후 급증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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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연적
분청사기 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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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진사 동물형 연적
백자진사 동물형 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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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영·정조 시기를 거쳐 19세기에 오면 경제 부흥과 더불어 미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도자는 17∼18세기 크게 발달하였던 청화백자와 순백자, 철화와 진사의 맥을 이으면서 필통, 지통, 연적, 묵호, 필가, 필세 등 다양한 용도의 문방구가 순백에서 첩화기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발전을 이룬다.

또 이 시기에는 청나라 문물이 빠르게 흡수되면서 서화 고동 취미가 퍼지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은 갖가지의 문물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이러한 문방구의 변화는 서화 문화와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랑방 선비 곁에 놓였던 작은 화로에서도 19세기 이후 청나라의 강한 영향을 살필 수 있다. 화로는 놋쇠(鍮)와 돌(石)로 주로 만들어 졌는데, 19세기 도자기로 만들어진 문방구의 종류가 확대되면서 화로 역시 이전에는 살필 수 없었던 양쪽에 큰 둥근 손잡이가 달린 청나라식의 화로를 볼 수 있다.

이렇게 19세기 이후의 문화 전반에 청나라의 영향이 있었고, 그것은 문방구 전반에 영향을 미쳐 당시 종이 역시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156) 『한국의 종이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5 및 정선영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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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산수문산형 필격 뒷면
청화백자 산수문산형 필격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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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필세
백자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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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
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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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도자로 만들어진 문방구의 급증은 당시 시대양상의 한 특징으로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청나라의 강한 영향뿐 아니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형태와 미를 추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우리의 정겨운 산수가 그려지고 낮고 험하지 않은 듯한 우리의 산을 연상하게 하는 <청화백자 산수문 산형필격(靑華白磁山水文山形筆格)>이라든지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형태로 용도에 맞게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붓을 빠는 <백자 필세(白磁筆洗)> 등은 그야말로 재치가 넘치는 귀중한 것이다.

17∼18세기 도자기의 흐름은 우리의 도자 기술의 한 획을 긋는 시기였으며, 더불어 차별화되는 기형과 아름다움을 발전시킨 시대 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 만들어진 19세기의 다양성은 당시 선비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면서 문화의 새로운 발전을 예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벼루와 관련해서 이러한 고급스런 물건들이 함께 하면서, 선비의 멋과 풍취를 더 빛나게 하였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벼루를 담아 두는 연상도 역시 그러하였다. 다리가 없이 상자 형태로 된, 앞서 본 흑칠연갑(黑漆硯匣)과 같은 형태가 있는가 하면, 다리가 달리고 그 아래 공간을 만들어서 여러 쓰임새로 만든 ‘연상’이라 부르는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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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 초상
이현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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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비들은 쓰고 있는 책상에 먹을 담아 두어서 책상 서랍을 까맣게 만든 경우도 있지만, 조선 시대 작은 책상에 연상과 필기도구 모두를 보관하는 것은 역시 무리라서 대부분은 연상이나 연갑이 필요하였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초상화를 보면, 한껏 차린 이현보 선생 앞에 놓인 책상에 붉은 색의 연갑이 보인다. 화려한 차림과 당당한 자세, 신발까지 차린 초상화 속의 책상 위에 진열된 물건들은 특별히 중하게 여긴 것들이다. 이현보 선생의 귀중품 중의 하나였던 이 주칠 연갑은 그가 가지고 있었을 소중한 벼루를 담아 두기에 알맞은 화려함을 가지고 있다.

연갑에 사용된 주칠은 일반 사가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던 칠이었다. 옻칠에 안료를 넣어 붉은 색을 내었던 주 칠은 궁중에서만 사용하였던 고가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심지어 주칠을 한 서안(書案)을 한 관리가 구경한다고 빌려가서는 가져오지 않아 상소가 올라 온 예도 있으니, 갖고 싶어도 쉽게 얻을 수 없었던 귀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57)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23일에 ‘사헌부 상소로 정탁을 해풍 농장에서 다시 변방으로 옮기다’의 내용에, “鄭擢을 邊方으로 옮겨 두었다. 사헌부에서 상하여 말하였다. ‘太上王께서 工人에게 명하여 朱紅書案을 만들게 하시고, 만든 뒤에 태상왕께서 이를 잊으셨는데, 정탁이 서안의 아름다운 것을 알고 사려고 하니, 공인이 말하기를, 進上할 물건을 어찌 감히 사사로 팔겠느냐하니, 탁이 말하기를, 내가 구경하고 돌려주겠다하고, 빌려 간지가 오래 되어도 돌려보내지 않으니 죄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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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硯箱)
연상(硯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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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갑이나 연상은 주칠로 화려함을 강조하거나 대나무를 쪼개어 붙여 장식하기도 하였으나, 문인들이 사용하였던 연상은 여인들이 사용하였던 화려한 화각 장식이나158) 소의 뿔을 얇게 연마하여 채색안료로 그림을 그려 나무 기물에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자개 장식은159) 전복, 조개 등의 패류를 얇게 연마하여 옻칠한 나무 기물에 붙여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미가 녹아 있는 단순한 형태의 도구들을 사랑하였는데, 연상을 예로 들어 살피면 먹감나무로 만들어 먹감나무의 자연스런 문양을 꾸밈으로 삼거나 결이 도드라지는 오동나무로 만들어 오동나무 결이 살아 결 자체가 장식이 되기도 하였다.

물푸레나무로 제작한 연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인보(鄭寅普, 1883∼1950) 선생의 글이 전한다.

내가 살면서 전에 공부한 것이 부끄럽지만 벼루에 연지도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연운과 같이 (문장이) 더욱 아름다운데 이것은 상이 이바지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름다운 나무에 물결 같은 무늬가 있고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듯한 (문양이) 세월이 오래다. 은혜롭고 좋은 것은 내 뜻을 알고 도끼질이 아주 잘 되어 있다. 만든 것은 질박한데, 능히 스스로 아담하다. 색은 참으로 다시 어루만지고 싶게 만들고, 비유컨대 높은 세상의 선비와 같다. 안으로는 족하나 겉으로 취할 것이 없다. 역사(驛使)가 처음 가져왔을 때 등을 밝히고 아내와 아이들이 받아 왔다. 문방구로서 위치가 편 안하다. 한번 웃으면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다스리는 도가 다만 이와 같더라.160) 具滋武, 『韓國文房諸友詩文譜』 下, 保景文化社, 1994, pp.323∼324.

조선시대 문인들은 벼루에서도 중국과 비교할 때 그리 많은 조각과 색채를 가미하지 않았듯이 연상에서도 그러한 태도를 가졌다. 이것은 문방에 놓인 가구 전반에서도 보는 것으로 깔끔한 외관에 자연적인 문양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문인들이 글을 쓰기 위해, 또 감상을 위해 두었던 벼루는 선비의 뜻을 담은 특별한 도구였다. 이와 함께 쓰인 연적이나 연갑, 연상 또한 당시 글을 썼던 문인들의 취향과 시대적 미감이 그대로 담겨 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전통 서화문화를 향유한 선비들의 도구들을 살펴보았다. 문방사우는 중국에서 일찍이 ‘호치후 저지백(好畤候楮知白, 종이)’, ‘관성후 모원예(管城候毛元銳, 붓)’, ‘송자후 이현광(松滋候易玄光, 먹)’, ‘즉묵후 석허중(卽墨侯石虛中, 벼루)’과 같이 벼슬을 주어 문방사후로 일컬었던 만큼, 선비에게 문방도구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져왔다. 이와 더불어 예술적 가치를 함께 함축하고 있는데, 이는 세련된 선비문화와 동행하였던 유산들이며, 서화문화사의 일부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유물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와 발굴을 통해 우리 문방구가 서화문화에 끼친 영향과 특성에 대한 고찰이 있기를 기대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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