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 02. 고대의 무속
서영대

한국 무속사에서 고대란 무속의 출현에서부터 삼국시대 말인 7세기까지이다. 그렇다면 무속의 출현이 언제부터인지라는 점이 우선 문제가 되겠다. 무속을 샤머니즘(shamanism)과 같다고 한다면, 샤머니즘의 출현은, 비록 원시씨족사회 말기,4)부육광, 『살만론』, 요령인민출판사, 2000, pp.7∼22. 석기시대 후기, 청동기시대,5)Esther Jacobson-Tepfer, Ancient North Asia Shamanism, Shamanism-An Encyclopedia of World Beliefs, Practices and Culture, ABC Clio, 2004, p.532. ; 대림태랑, 「シャマニズムの기원」, 『북방の민족と문화』, 산천출판사, 1991, pp.125∼140. 등으로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류사의 초기에 이미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6)최근에는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기는 하나(Esther Jacobson-Tepfer, 앞의 책, p.535), 아직 학계의 주류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유물 중에도 무속의 존재를 짐작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토제 또는 골제의 인형들이다. 한국의 신석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는 패각·수골·토제인형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신상(神像)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신상은 Tungus(Evenki)족 샤먼의 텐트에 걸어두는, 수호령 내지 조상으로 여겨지는 Khomoken이란 목제 신상과 흡사하다.7)金元龍, 「한국先史시대의 神像에 대하여」, 『한국考古學硏究』, 일지사, 1987, pp.186∼199.

둘째, 각종 청동의기이다. 한국의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 중에는 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각종 의기가 있다. 방패형 청동기·검파형 청동기·나팔형 청동기·견갑형 청동기·원반(개)형 청동기·청동 방울(팔주령, 쌍두령, 간두령)·청동 거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검도 의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중에는 샤머니즘 내지 무속과의 관련성을 짐작케 하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방패형 청동기(농경문 청동기로도 알려져 있음)에 그려진 나무 위의 새 그림은 시베리아 샤만의 세계수(world tree)를 연상시키며8)Uno Holmberg, The Mythology of All Races Ⅳ- Finno-Ugric, Siberian, Cooper Square Publishers, 1964, p.511의 Fig. 20 참조., 사슴과 사람의 손 문양이 있는 검파형 청동기도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슴은 샤머니즘과 관련이 깊은 동물이며, 손의 표현 역시 샤머니즘 관련 유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9)이건무, 「한국 청동의기의 연구」, 『한국고고학보』28, 한국고고학회, 1992, pp.131∼221. 뿐만 아니라 원반형 청동기는 무구의 하나인 명도를 연상시키며,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방울은 현재의 무속의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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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호곡리 토제인형-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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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호곡리 토제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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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암각화 유적이다. 한국에서는 암각화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제작 시기는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암각화는 화제에 따라 추상형 암각화와 구상형 암각화(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로 대별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상형 암각화이다. 구상형 암각화의 대표적 유적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대곡리 암각화라고도 함)이다. 여기에는 수렵·어로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수렵·어로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동물이 죽으면 그 영혼이 타계로 갔다가 다시 육신을 가지고 현세로 되돌아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수렵·어로인들은 수렵이나 어로 후에 잡은 동물의 영혼이 무사히 타계로 귀환할 수 있도록 성대한 의례를 거행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바로 이러한 의례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직립한 고래(경)와 거북(귀)의 행렬이 있고, 행렬의 선두와 후미에는 특이한 모습의 인물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각각 타계로 귀환하는 고래·거북과 귀환 행렬을 타계로 인도하는 무사의 령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암각화 자료 역시 신석기∼청동기시대 무속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할 때 한국에서 무속은 신석기∼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시기에는 직업적인 무격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점뼈[卜骨]인데, 점뼈란 골복(scapulimancy)에 사용되는 짐승의 뼈로, 한국에서는 사슴과 멧돼지의 것이 많다.10)한국의 복골에 대한 종합적 硏究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殷和秀, 「한국 出土 卜骨에 對한 考察」 『湖南考古學報』 10, 호남고고학회, 1999, pp.5∼30. 그리고 한국에서는 주로 점상유작법(點狀有灼法)에 의한 점복이 행해졌다. 즉, 짐승의 뼈에 미리 타는 부분을 만들고 여기를 불로 지져 생기는 구열(龜裂)을 보고 점을 친 것이다. 그런데 무산 호곡(虎谷, 범의 구석)이나 김해 부원동 같은 청동기시대 마을유적을 보면, 복골은 특정 주거지에서만 출토된다. 이것은 이 주거지의 거주자가 직업적 종교전문가(religious specialist)였음을 암시한다.11)徐永大, 「한국古代의 宗敎職能者」, 『한국고대사연구』 12, 서경문화사, 1997, p.211. 그리고 이 시기의 종교전문가라면 무격을 두고, 달리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신석기∼청동기시대에서 7세기까지가 하나의 시대로 묶여질 수 있는 근거는, 이 시기에는 무속이 정치·사회·개인이란 세 영역에서 모두 기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즉, 다른 시대와는 달리 정치적 기능까지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뒷받침하는 사실로는 우선 국왕의 무격적 성격을 들 수 있다. 물론 국왕의 무격적 성격은 같은 고대라도 시기나 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초기 단계는 왕 자신이 무격이었으며, 무왕(shaman-king)적 존재였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는 이러 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단군신화에는 단군에 앞서 인간 세상을 통치한 이가 환웅(桓雄)이다. 그런데 환웅은 천신인 환인(桓因)의 아들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인간 세상을 통치했는데, 그의 중요 임무 중에는 곡식과 생명, 병을 다스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즉, 기후 신을 통솔하면서 풍요와 인간의 생명, 나아가 질병의 치료까지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곰을 인간으로 변신시키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환웅이 세속적 군주 그 이상의 작용을 담당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의 완전한 이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인데, 단군은 종교적 지도자,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12)崔南善, 「不咸文化論」, 『六堂崔南善全集』 2, 현암사, 1973, p.40. 따라서 고조선의 지배자는 단순한 정치권력자가 아니라,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초월적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종교적 지도자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부여에서도 한때 홍수나 가뭄이 발생하면 모든 잘못을 왕의 탓으로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였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왕에 대한 기대치가 정치권력자 이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즉, 부여 왕은 초자연적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풍요를 책임지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것이다.13)『三國志』 권30, 魏書30, 東夷傳, 夫餘(王 殺害=regicide를 隨伴하는 典型的인 神聖王權sacred kingship의 事例이다).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 국가이다. 그런데 청동기문화 단계의 지배자의 무덤인 돌널무덤[석관묘]에서는 칼(세형동검)·거울(정문경)·옥(곡옥이나 관옥)이 같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으며,14)김정배, 「검·경·옥과 고대의 문화와 사회」,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6, pp.209∼223. 이 중 거울이나 옥은 종교적 의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청동기 단계의 지배자가 종교적 기능까지 담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고조선 내지 청동기 단계의 정치권력자가 무왕(shaman-king)적 존재라는 사실은 문헌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권력자의 성격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변 질되기 시작한다.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는 복잡해지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 또한, 빈번해진다. 이에 따라 국왕에 대한 기대치도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고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 결과 국왕의 종교적 기능은 줄어들면서 서서히 무왕적 성격을 벗어나게 된다. 철기시대 이후 지배층의 무덤에서 의기의 비중이 줄어드는 대신, 무기의 비중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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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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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제 곡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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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철기시대로 접어든 삼국시대에도 국왕은 무왕적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국왕이 천신의 후예임을 강조하는 건국신화가 왕권 정당화의 논리로 여전히 유효했으며, 이를 재연하는 절차인 국가 제사를 국왕이 직접 주제했다. 나아가 신라의 경우,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자충)이 한때 왕의 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왕의 예언 능력이 왕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되고 있다.

예컨대 신라 제9대 벌휴왕(伐休王, 184∼195)은 “풍운을 점쳐 수한과 풍검(豊儉)을 미리 알았으며, 사람의 사정(邪正)을 알았다.”고 한다.15)『三國史記』 권2, 新羅本紀2, 伐休尼師今 卽位 前記. 또 제27대 선덕여왕(632∼641)은 지기삼사(知幾三事) 설화를16)『三國遺事』 권1, 紀異1, 善德王知幾三事 ; 신종원, 「선덕여왕에 얽힌 소문의 진실」, 『삼국유사 새로 읽기』Ⅰ, 일지사, 2004, pp.110∼146에서는 이 설화가 선덕여왕 당시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수긍되는 부분이 많지만, 이 설화가 선덕여왕의 일면을 전한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언 능력의 뛰어남이 부각되고 있다. 선덕여왕 당시는 삼국의 항쟁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던 만큼, 국왕에 대한 기대치는 무엇보다도 군사적 리더십이었을 터임에도 불구 하고 예언 능력이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은 신라 왕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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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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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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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의 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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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신라의 왕관이 시베리아 샤먼의 관모와 비슷하다는 점도 신라의 왕이 무왕적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17)신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국왕이 전투를 직접 지휘한 사례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것은 신라왕의 성격을 고려함에 있어 시사하는 바 크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삼국시대에도 국왕의 종교적 권위는 왕권 정당화의 논리로서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본격화되면서18)이런 경우, 흔히 제정일치란 말을 사용하나, 이 말은 일본 국수주의 신도의 용어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국왕이 가지고 있던 최고 종교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역할은 다른 종교 전문가에게 양도된다. 마한의 천군이 국읍의 제천의례를 주관했다는 것이나, 신라 왕의 누이 아로(阿老)가 시조묘 제사를 주관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의 일단을 보여준다. 특히, 아로의 경우는 흥미로운데, 정치와 종교의 분리 후에도 최고 종교지도자로서의 지위와 기능은 왕실 밖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여성에 의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9)아프리카 왕국들에서는 royal sister가, 일본의 천황가에는 천황의 누이(伊勢神宮의 최고 사제인 齋王)가 국가 최고의 사제 기능을 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Lucy Mair, African Kingdoms,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pp.49∼53 ; 榎村寬之, 「齋王制度の硏究」, 『律令天皇制祭祀の硏究』, 塙書房, 1996, pp.135∼274).

둘째, 무격적 존재들이 국가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든지, 국 왕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좌했다는 것도 이 시기 무속의 정치적 기능을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활약한 종교전문가로는 무격·일자(日者) 또는 일관(日官)20)辛鍾遠, 「古代의 日官과 巫」, 『新羅初期佛敎史硏究』, 민족사, 1992. ; 崔錫榮, 「巫와 日官의 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 『比較民俗學』 13, 비교민속학회, 1996.·점자(占者)·복사(卜師) 등이 보인다. 명칭이 다른 만큼, 이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일자나 일관은 주로 천상이나 기상의 이변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작용을 담당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이들 모두 넓은 의미에서 무격적 존재라 해도 큰 잘못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고대의 국가 조직에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관의 경우, 명칭부터가 그러하며, 나아가 백제에는 일관부라는 관청까지 있었다.21)『周書』 권49, 異域傳, 百濟. 또 신라에는 봉공복사(奉供卜師)라는 점복 담당 관직이 있었다.22)『三國史記』 권39, 職官志 中.

이들은 국가의 관리로서 신령의 세계와 통할 수 있는 종교적 능력을 바탕으로 국정에 이바지했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자문을 했으며, 천재지변이나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처 방안을 제시했다. 때문에 왕이 출행(出行)할 때도 이들을 대동했으니, 고구려 차대왕이 평유원(平儒原)에 사냥 갈 때 사무(師巫)를 대동했다.23)『三國史記』 권15, 高句麗本紀3, 次大王 3년 7월. 신라 진흥왕이 마운령 방면으로 순수할 때 대사 관등의 점쟁이 여난(與難)을 대동한 사실은 이러한 점을 확인시킨다.24)한국고대사회연구소, 「摩雲嶺巡狩碑」, 『譯註 한국古代金石文』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88.

그러나 불교의 수용과 확산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무속은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수용된 것은 4세기였다. 그런데 무속이 현세에서의 지복을 추구하는 현세 긍정적 종교라면, 불교는 현세를 덧없는 것으로 보는 현세 부정적 종교이다. 또 무속이 신령의 뜻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면, 불교는 인간 스스로의 주체적 노력을 중시한다. 뿐만 아니라 무속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불교는 새로운 질서를 표방했다. 이처럼 이질적인 종교였기에 양자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삼국시대를 통하여 불교는 서서히 무속에 대한 우위를 확보해 나 간다. 무속에 비해 불교가 사상의 체계성·문화적 선진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관심이 불교로 기울어졌다. 그러다가 신라의 반도 통일을 전후하여 불교 교학의 수준이 한층 높아지면서, 마침내 불교의 우위는 확고해 진다. 그 결과 무속은 기층 사회로의 침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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