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 04. 근세의 무속
서영대

한국무속사에서 근세는 16세기 사림파의 집권에서 시작되며 이 시기의 특징은 무속이 사회적 기능마저 상실한다는 점이다.63)조선 후기의 무속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이필영, 「조선 후기의 무당과 굿」, 『정신문화연구』 5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조선왕조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건국되었던 만큼 초기부터 무속에 대한 탄압과 배척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무속을 일거에 말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 관서마다 부근당(付根堂, 府君堂)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말해 준다. 부근당이란 조선시대 궁궐과 관아 내에서 설치된 신당, 부군당(府君堂·附君堂·符君堂)이라고도 하며 단순히 신당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관아 내에 부근당이 있었으며, 심지어 창덕궁과 같은 궁궐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부근당은 독립 건물이지만, 대체로 관아 구내의 북쪽 구석진 곳에 위치했으며, 내부에는 부근신의 신상을 두고 지전(紙錢, 길게 찢은 종이로 다발을 만들어 엽전이 달린 것처럼 만든 무속의 도구)이나 나무로 만든 남자 성기 모형을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그러나 관청에 따라 모시는 부근신은 달랐는데, 송씨 부인이나 송씨 처녀(처녀귀신) 같은 여성도 있고 왕이나 장군 같은 남성신도 있었다. 그리고 남성신에는 동명왕·공민왕 같은 왕신(王神), 최영·임경업 같은 장군신, 심지어 제갈량이나 문천상(文天祥, 1236∼1283) 같은 중국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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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전(紙錢)』
『지전(紙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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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부근신에 대해서는 각 관청에서 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했는데,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10월이 많고 관아에 따라서는 정월 또는 3∼4월도 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수시로 의례를 거행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부근신에 대한 의례는 해당 관청의 이서(吏胥)들이 무당을 동원하여 지내는 축제 형식이었으며, 의례의 목적은 관아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중에는 송씨 부인이나 송씨 처녀가 부근신인 점이나 남자 성기 모형을 바친 점으로 미루어, 또 부임 첫날 신관 사또가 비명횡사했다는 아랑형 원귀설화로 미루어, 관아의 신을 달래는 의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서들 뿐만 아니라 사족 출신의 관리도 새로 부임하면 부근당에 가서 일종의 신고식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재임 기간 동안 부근신의 가호를 빌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 의금부의 경우에는 죄수들이 나무를 깎아 남자 성기 모형을 만들어 부근신에게 복을 빌었다고 한다.

부근당은 어효첨(1405∼1475)이 거쳐 간 관청의 부근당을 모두 없앴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선 전기에 이미 존재했다. 그런데 부근당에 대해서는 상고시대 광명숭배(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성기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렇다면 부근당은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되었던 시기의 유제로서 조선시대 이전부터 관아에 설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군당은 유교 이념과는 배치되는 신앙이며 때문에 어효첨과 같은 유학으로 무장된 관리들이 나서서 부군당을 철폐하거나, 사헌부 같은 특정 부서가 부근당 철폐를 발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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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고동 부근당
서빙고동 부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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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왕조를 통하여 부근당을 공식적으로 철폐한 적은 없었다. 폐지는커녕 낡았을 경우에는 중건을 했으며, 사역원의 부근당처럼 1707년(숙종 33) 중건하면서 원래 보다 규모를 더 늘린 예도 있다. 부근당은 조선왕조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1898년 무렵 모두 철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소속 관원들이 신벌을 두려워하여 감히 철폐하는데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조선시대를 통하여 부근 신앙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부근당 신앙은 민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관아 부근당의 일부는 관아가 없어진 이후에도 민간 신앙의 신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마을 제당의 명칭으로 부근당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현재 서울 그중에서도, 특히 한강변에 위치한 마을 제당의 명칭에 부근당이 많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또 사대부 출신인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에 그의 집안은 치병이나 망자 천도를 무녀에 의존하여 해결하려 했던 사실이 확인된다.64)이복규, 「묵재일기에 나타난 무속」, 『묵재일기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민속』, 민속원, 1999, pp.61∼74. 이러한 사실들은 무속이 얼마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관아명 신당명 부근신 위치와 규모 전 거
창덕궁 부군당   후원 능허정 아래 『동궐도』
병조 부군당 문천상   『조선종교사』
형조 부군당 송씨부인   『조선무속고』
제갈공명 『조선종교사』
호조 신당     『공사기고』
공조 신당   서리청 바로 오른쪽 『숙천제아도』
사헌부 부군당     『패관잡기』
의금부 부군당 여성신   『성소복부고』, 『승정원일기』 현종 8년 11월 13일
포도청 부군당 송씨부인   『조선종교사』
전옥서 부군당 동명왕   『조선무속고』
사역원 부군당 송씨부인 구내 누각의 정북, 2간 『통문관지』, 『조선종교사』
교서관=운관 부군당 임경엽   『동국여지비고』
양현고 부근당     『중총실록』 6년 3월 기묘
의영고 부군당 송씨처녀 구내 뒷편 『이재난고』
귀후서 신당     『동국여지비고』 2
종친부 신당   구내 규장각 좌측(2칸 담으로 구획) 『숙천제아도』
선혜청 신당   사고와 북벽 사이의 독립된 공간(2칸) 『숙천제아도』
도총부 신당   서리청 북서쪽 담 밑(2칸) 『숙천제아도』
사복시 신당   구내 서북 구석(1칸) 『숙천제아도』
제용감 신당   구내 동북 구석 『숙천제아도』
한성부 부군당 공민왕 4칸 『경조부지』, 『조선종교사』
경기감영 신당     경기감영도
양근 분원 부군당 6정군   『하재일기』
평안도 영유현 신당   관아 구내 동북 구석 『숙천제아도』
황해도 신천군 신당   관아 북쪽 구석 『숙천제아도』
전라도 영암군 부군당   관아 남문 앞 『조선 후기지방지도』
경기도 교동현 부근당   읍성 북쪽 성벽 내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일반 지방관아   최영 이청 옆 『연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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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제아도』의 신당-종친부
『숙천제아도』의 신당-종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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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천제아도』의 신당-제용감
『숙천제아도』의 신당-제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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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6세기부터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이 집권하면서 무속의 말살을 주장한다. 사림이란 고려 말 신흥사대부 계층의 한 갈래로 고려왕조의 존속을 주장하면서 절의를 중시했던 세력이다. 때문에 이들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향촌사회로 낙향했으나,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세력을 성장시켜 마침내 16세기에는 조선왕조의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사림파는 자신들이 기반을 둔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성하고자 했는데, 이때 특히, 무속이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무속은 자신들의 지도이념인 성리학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향리 세력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권과 더불어 무속의 근절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첫째, 귀신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65)조선시대 유학자의 귀신론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조동일, 「15세기 귀신론과 귀신이야기의 변모」 『문학사와 철학사의 관련 양상』, 한샘, 1992 ; 文相琦, 「朝鮮朝 士類의 鬼神觀 硏究」, 『부산한문학연구』 9, 부산한문학회, 1995 ; 김현, 「조선 유학에서의 귀신 개념」, 『조선 유학의 자연 철학』, 예문, 1998. 조선시대 유학자의 귀신에 대한 논의는 남효온(1454∼1492)·김시습(1435∼1493)에 의해 시작되는데, 이들의 논의는 귀신을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운동 내지 보이지 않는 천지의 조화 작용으로 보는 성리학적 귀신관에서 출발한다.66)三浦國雄, 이승연 옮김, 「귀신론」, 『주자와 기, 그리고 몸』, 예문서원, 2003, pp.81∼82. 이를 바탕으로 남효온의 경우,67)『추강집』 권5, 「귀신론」. 사후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나아가 귀신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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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초상
김시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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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논하면서 남효온은 무속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를 보면 남효온은 무속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주례』와 같은 유교 경전에도 무격이 국가 조직의 일원으로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 무속의 신은 사특한 기운일 따름이며, 지금의 무격들도 잘못된 가르침으로 백성들을 어리석게 할 뿐이라고 했다.

김시습 역시 지금의 무당은 귀신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요사스런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고 망령되이 화복을 칭탁하여 돈과 곡식을 허비하고, 산귀(山鬼)나 요물은 이를 조장하여 가산을 탕진하게 한다.”고 하여 무속을 비판했다.68)『梅月堂集』 권17, 鬼神 第八. 이러한 논의는 이들의 귀신 논의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즉, 성리학적 귀신론을 통하여 무속의 존립 근거를 없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무속을 부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중앙에서는 무속 말살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했다. 이들은 무격의 동서활인서 배속 중지를 건의하고 무세 징수의 중단을 요청했다. 얼핏 생각하면 이것은 무속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서활인서 배속을 중지하고 무세를 징수하지 않음으로써 무격들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즉, 국가에서 무격에게 의무를 지워주는 것은 이들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무격을 불법화하기 위해서는 동서활인서 배속이나 무세 징수를 중단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셋째, 관리로 부임하면, 관권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무속의 금지와 탄압을 추진했다. 중앙 관서의 관리로 부임해서는 해당 관청의 부근당을 철폐했으며, 지방관으로 파견될 경우 지방의 무속적 전통을 근절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사림파의 집권을 계기로 무속의 사회적 기능은 사라진다. 무속적 동제(洞祭)가 무격이 배제된 유교식 동제로 변모하는 것도 그 결과의 하나라고 생각된다.69)동제의 변모를 경제적 이유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무속적 동제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드는 유교식 동제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무속의 개인적 기능은 사림파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무속의 성격 때문이다. 무속은 현세 긍정의 종교로서 현세를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즉, 무속은 생존의 종교이다. 이 점 때문에 무속은 기복적이며 차원이 낮은 종교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내세의 구원이나 고매한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현세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의 해결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현세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무속을 능가하는 종교가 없다. 따라서 무속은 고매한 이상을 추구하는 어떤 종교가 도입되더라도 생존의 종교로서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한계 때문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고도의 철학이지만, 인간으로서 최대의 관심사인 길흉화복의 조절이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은 기(氣)가 모여서 된 것이며, 죽으면 귀신이 되지 않고 그 기는 흩어져 천지자연의 기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즉, 자아라는 실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죽음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간에게 성리학의 논리는 무엇인가 부족한 감이 있다. 더구나 기가 흩어져 자아라는 실체가 없어진다면 제사를 지닐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제사를 흠향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제사를 강조하는데, 이는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성리학의 한계는 무속이 존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래서 조선 후기와 같은 유교사회에서조차 무속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입장까지 나타나게 된다. 『천예록(天倪錄)』에 수록된 「용산강신사감자(龍山江神祀感子)」라는 설화가 그것이다. 곧, 유교식 제사보다 무속의 조상굿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설화의 골자이다.70)옛날에 이름난 재상이 승지로 있을 때, 새벽에 장차 입궐하려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려다가 너무 일러서 돌아와, 베개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말을 타고 대궐을 향해 가다가 把子橋 앞에 이르러 어머니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상은 깜짝 놀라 즉시 말에서 내려와 반기면서 절을 하고, “어머니께서는 어찌 가마도 타지 않고 혼자 걸어오십니까?” 하니, 어머니가 “나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살아 있을 때와 다르니 걸어서 가는 것이다.” 했다. 재상이 “지금 어디로 가시기에 여기를 지나십니까?” 하니, 어머니는 “용산강 옆에 사는 우리 집 종 아무개 집에서 지금 굿을 차린다기에 음식을 먹으러 길이다.” 했다. 재상이 말하기를 “저희 집에서 忌日 날 제사·계절마다 제사와 명절이나 초하루·보름의 茶禮를 다 지내는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노비 집의 굿에 음식을 드시러 가는 지경이 되셨습니까?”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제사가 있더라도 神道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무당의 굿만을 중하게 여길 뿐이다. 굿이 아니면 혼령들이 어찌 한 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갈 길이 바빠 오래 머물 수 없다.”면서, 이별을 고하고 훌쩍 떠났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재상이 바로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속의 일이 황홀하면서도 너무나 생생하였다. 이에 종 한 사람을 불러 명하기를, “너는 용산강에 사는 종 아무개 집에 가서 오늘 저녁에 나를 보러 오라고 해라. 그리고 너는 내가 입궐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 종이 과연 급히 돌아왔는데, 아직 날이 채 밝기 전이었다. 때가 몹시 추워서 종은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 숨을 헐떡거리고 떨면서 불을 쬐니, 동료 종이 부엌에 있다가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왔느냐고 물었다. 종이 말하기를, “그 집에서 마침 큰 굿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녀가 하는 말이 ‘우리 집 상전 대부인의 신이 자기 몸에 내렸다.’고 하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우리 집에서 심부름 온 종이로구나.’ 하며 앞으로 불러서 큰 잔에 술을 따라주고 음식도 한 그릇 주면서, ‘오는 길에 파자교 앞길에서 우리 아들을 만났다‘고 하더라.” 했다. 재상은 방에 있다가 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놓아 통곡하고, 종을 불러 상세히 묻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어머님이 굿에 가서 흠향한 것을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무녀를 불러 성대하게 굿을 벌려서 어머니가 잡수시도록 했고, 이어서 계절마다 꼬박꼬박 굿을 했다고 한다.

셋째, 조선왕조 무속정책의 모순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무속 금압의 일환으로 무격들의 도성 내 거주를 제한하고 도성 밖으로 축출하였다. 물론 거주 제한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선 초기에는 사대문 안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한강 안이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대전통편』 호전 잡세조에서 “경성 내의 무녀는 강외(江外)로 쫓아낸다.”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강이란 한강이다. 이것은 서울의 범위가 시대에 따라 확대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사대문 안이든 한강 안이든 간에, 이러한 규정은 도성 밖에서의 무업을 인정하는 의미가 된다.

또 각종 중앙 관청 및 지방 관청의 재정의 상당 부분을 무세로 충당한 점도 문제였다. 예컨대 무세를 가지고 동서활인서나 귀후서(관곽(棺槨)을 제조·판매하며, 기타 장례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경비로 충당했으며71)『중종실록』 권1, 중종 13년 정월 무오 및 기미. 일부는 국방비로 전용했다.72)『만기요람』 財用篇 巫稅. 따라서 무세를 징수하지 않을 경우 이들 관청의 운영이 어려워진다. 나아가 무세에 대해 지방관의 재량이 상당히 주어졌고 사복을 채우기에 편리했으므로 표면상으로는 무속 근절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무속을 없애기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도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피흉추길(避凶追吉)을 무속에 의존하는 경향은 여전했다.

먼저 왕실의 경우 사사로이 복을 비는 별기은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대표하는 것이 고종(재위 1864∼ 1907)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별기은이다. 조선왕조 역대 왕비 중 가장 무속에 심취했다고 하는 명성황후는 세자(후일 순종)의 전정(前程)을 위해 빈번하게 명산대천 등에 빌었고 그 때마다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때 사용된 물품의 목록을 적은 위축우기(爲祝件記, 발기)가 남아있어 상세한 내용이 확인된다.73)金用淑, 「궁중의 産俗 및 무속」,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일지사, 1987, pp.268∼270.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는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를 몸주신으로 모신 무녀를 총애하여, 그에게 진령군(眞靈君)이란 작위를 내리는가 하면 관우의 사당인 북묘(北廟)를 지어주기도 했다.74)한국에서 관우신앙이 확산되는 데에는 명성왕후가 작용한 바 크다.

또 궁중의 기빈(妃嬪)들 사이에서는 무고(巫蠱)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중종 때 경빈 박씨 사건, 광해군 때 인목대비 사건, 인조 때 정명공주, 효종 때 조귀인 사건,75)김호, 「효종대 조귀인 저주 사건과 동궐 개수」, 『인하사학』 10, 인하사학회, 2003. 숙종 때의 장희빈 저주 사건76)Boudewijn Walraven, 「장희빈 저주사건의 신해석」, 『제1회 한국학국제학술회의논문집』, 인하대, 1987. 등이 그것이다.77)이능화, 「조선무속고」, 『계명』 19, 계명구락부, 1927년의 제14장 무고에 이들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1530년(중종 25)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의 세자 저주 사건,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의 광해군 저주 사건, 1639년(인조 17)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의 인조 저주 사건,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비 강빈의 인조 저주 사건, 1651년(효종 2) 인조의 후궁 조귀인(조귀인)의 효종 저주 사건, 1701년(숙종 27)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 사건 등은 왕실에서부터가 개인의 이익 추구 차원에서 무속이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관청마다 두었던 부근당은 일부 관리들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말까지 계속 존재했다. 이 중 사역원의 경우 광무 연간(1897∼1906) 부근당을 철폐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벌(神罰)을 두려워 감히 손대지 못했는데, 서양인이 이를 부수고 모셔둔 양걍물(陽莖物) 10여 개를 가져갔다고 한다.78)李能和, 『朝鮮宗敎史』, 영신아카데미, 1983, pp.33∼34.

이처럼 무속의 개인적 기능만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무격의 숫자도 증가 추세를 보인다. 19세기 초 순조 때 약 5천 명 정도로 추산되던 무격의 총수가 1935년에는 12,380명으로 증가한다.79)村山智順, 『朝鮮の巫覡』, 朝鮮總督府, 1937, pp.6∼7. 100년 남짓한 사이에 두 배로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무격의 증가는 지역의 사례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경상도 단성현의 경우 18세기 중엽 이전에는 전체 인구의 0.05%에 불과했던 무격이 중엽 이후가 되면서 0.2∼0.4%의 비율로 증가한다.80)임학성, 「조선 후기 경상도 丹城縣戶籍을 통해 본 巫堂의 존재 양태」, 『대동문화연구』 47, 성균관대학교, 2004, pp.70∼71. 사회적 수요가 없다면 이와 같은 증가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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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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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후기 이후 한국 무속에는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으로는 우선 관우신앙의 보급의 보급을 들 수 있다. 관우신앙이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이었던 관우에 대한 신앙이다. 관우는 현재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계층을 초월하여 위로는 황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또 종교의 경계를 초월하여 유교·불교·도교 모두가 받드는 신이었다. 과거 북경의 사묘 중에 관제묘가 가장 많은 것도81)馬書田, 『道敎諸神』, 北京: 團結出版社, 1996, pp.307∼308.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중국에 가면, 호텔이나 상점 등에서 관우상을 모신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관우신앙은 과거는 물론, 현재도 살아있는 신앙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우신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정유재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주둔지 여러 곳에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를 건설했다. 선조 31년(1598) 유격 진인(陳寅)이 서울의 숭례문 밖에 남묘를 건설한 것을 필두로, 같은 해에 안동·성주·강진 고금도, 이듬해인 선조 32년(1599)에는 남원에 관왕묘가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평양·한산도 등지의 전투 때 관우의 신이 나타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소문을 내기까지도 했다.82)許筠이 선조 30년(1602)에 지은 「勅建顯靈關王廟碑」(『惺所覆瓿藁』 권16, 文部 13) 참조. 명나라에서 온 장수들은 신조(神助)를 기원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찾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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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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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은 조선왕조에 대해 자신들의 신앙인 관우숭배를 종용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4천금을 보내면서 왕경에 관왕묘를 건립토록 하였다. 그 결과 선조 34년(1601)에 완성된 것이 바로 흥인문 밖의 동묘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관우신앙의 수용에 소극적이었고 나아가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관우숭배가 강요된 신앙이란 점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조선왕조에서는 관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선조 7년(1574) 성절사의 일행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던 허봉(1551∼1588)은 관우에 대해 “죽은 후에 자기 나라가 망하는 것도 붙들지 못했는데 어찌 남을 도울 수 있겠는가?”83)『朝天記』 上, 갑술년 6월 24일: 『국역 연행록선집』 1, 민족문화추진위원회, 1976, p.337.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합리성을 추구하는 유교국가인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관우신앙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우신앙은 점차 한국의 문화와 융합되기 시작한다. 특히, 숙종 때가 되면 왕이 남묘와 동묘에 직접 참배하는 등 관우신앙에 적극성을 보인다.

숙종대를 계기로 본격화된 국왕의 관왕묘 친알은 이후에도 계속될 뿐만 아니라, 영조와 정조는 관우숭배에 더욱 적극성을 보인다. 즉, 영조는 남묘와 동묘에 친필로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고 쓴 편액을 내리는가 하면,84)『영조실록』 권64, 영조 22년 8월 을유. ‘만고충절(萬古忠節)·천추의열(千秋義烈)’이란 글씨를 보내어 게시토록 하였다.85)『영조실록』 권97, 영조 37년 8월 신묘. 또 정조는 숙종·영조·사도세도·정조가 관우의 충절을 찬양한 글을 새긴 비석을 남묘와 동묘에 세웠다.86)『정조실록』 권20, 정조 9년 11월 신유. 이들 비문은 『서울금석문대관』 1, 서울특별시, 1987과 『서울금석문대관』 3, 서울특별시, 2000에 원문과 번역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우에 대한 제사는 정식으로 사전(祀典)에 편입되어, 그 결과 영조 20년(1744)에 완성된 『국조속오례의』에 소사(小祀)로 등재된다.87)관우 제사에 대해서는 정조 12년(1788)에 편찬된 『春官通考』 권44, 吉禮, 關王廟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관우숭배는 19세기를 전후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다. 첫째,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관우신앙에 열심이었다. 왕실의 경우 명성황후 민씨는 관성제군을 몸주로 모신 진령군을 총애하여 온갖 특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묘란 관왕묘를 지어주기까지 했다.88)『梅泉野錄』 권1, 甲午 이전.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 민씨가 총애하던 무녀 眞靈君은 서울의 천민 출신으로 성은 이씨이며, 자신을 관왕(關王=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關羽)의 딸이라 한 점으로 미루어 관왕을 몸주신으로 모신 강신무로 짐작된다. 또 관왕의 신이 들리면 쥐고 있던 붓이 저절로 움직여 글씨를 쓰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자동필기(automatic writing)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1882년(고종 19) 명성왕후가 임오군란으로 말미암아 장호원에 피신하고 있을 때 환궁 시기를 예언한 것이 적중했고, 환궁 이후에도 명성왕후가 아플 때 주물러 주면 곧 낫곤 했다. 이에 명성왕후는 신처럼 믿어, 진령군이란 군호(君號)를 수여했고, 또 1883년에는 서울 송동(宋洞, 지금의 명륜동)에 관왕을 모시는 북묘(北廟)를 지어 거주하도록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 부부는 북묘로 피신했는데, 이는 물론 관왕의 보호를 기대한 것이지만, 진령군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렇듯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자, 그의 아들 김창렬(金昌烈)도 벼슬을 했으며,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이 진령군에게 아부하고 양자가 된다든지 하여 관직을 얻었다. 예컨대 이유인(李裕寅)은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다고 속여 진령군의 주선으로 관계로 나가 한성판윤·법부대신을 역임하기까지 했다. 이로 말미암아 진령군을 탄핵하는 상소들이 잇달았지만, 고종은 오히려 진령군을 두둔하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처벌했다. 진령군은 권세를 이용하여 강원도 홍천군 서면 붓꼬지 마을에 관성사(關聖祠)를 건립했으며, 충주 백운암을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피살되자 진령군도 후원자를 잃고, 삼청동 골짜기에 숨어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고 하며, 그가 머물던 북묘도 1909년 국유지로 귀속되었다가 친일단체인 神宮敬義會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아가 갑신정변 때 왕은 이곳으로 피난할 정도로 관우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89)「北廟碑」, 『서울金石文大觀』, 서울특별시, 1987, p.197. 또 고종의 후궁 엄비 역시 관성제군을 몸주로 모신 현령군을 총애한 것도 명성황후에 못지않았으며, 현령군을 위해 서묘를 지어주기도 했다.

다음 사례들은 기층 사회에도 관우신앙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 고종 22년(1886) 8월 26일, 공조참판 이응진이 상서에서 소민(小民) 들이 문미(門楣)에 복마성제(伏魔聖帝=관우)이란 글자를 걸어둔 것이 많은데,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고종실록』 권22).

○ 광무 3년(1899) 남묘가 불탔을 때, 사람들이 자원해서 다투어 부역을 했고 기부금을 내었다(『독립신문』 1899년 2월 20일자 및 3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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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건립 연대가 확인되는 관왕묘 중에는 19세기의 것이 많다. 고종 17년(1880)의 평양 관제묘,90)평양향토사편집위원회, 『평양지』, 국립출판사, 1987, p.309. 고종 20년(1883)의 서울 북묘, 광무 6년(1902)의 서울 서묘, 고종 21년(1884)의 강화 남관왕묘, 고종 22년(1885)의 강화 남관왕묘, 고종 29년(1892)의 강화 북관왕묘,91)강화 관왕묘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續修增補 江都誌』, pp.69∼70 참조. 고종 31년(1894)의 전주 관성묘, 한말 홍천군 붓꼬지의 관성사92)김의숙, 「홍천군 붓꼬지의 관성사 연구」, 『강원지역문화연구』 2, 강원지역문화연구회, 2003, pp.93∼106. 등이 그것이다.93)개성에도 高麗町 兵橋 북쪽에 관왕묘가 있었고, 매년 춘추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했다고 하나(『開城』, 예술춘추사, 1970, p.60),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종 연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의 장충동 관성묘도 고종의 엄비가 건립한 것이란 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94)『서울민속대관』 1-민간신앙편, 서울특별시, 1990, p.263. 이 시기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19세기를 전후하여 관우신앙의 중심인 관왕묘가 크게 증가했다.

한국에서 관우는 신격으로서의 성격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즉, 무신(武神)→재신(財神)→무신(巫神)으로 변천했다. 중국의 경우 무신·재신이란 관념은 있으나 무신이란 관념은 불확실하다. 따라서 무신으로서의 관우신앙은 한국의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관우는 원통하게 죽은 장군이란 점에서 한국 무속의 장군신과 통하는 점이 있다.

조선 후기 무속의 새로운 양상으로는 무격들이 요언을 살포하고, 변란 기도에 동참하였다는 사실이다. 현세에서 이상사회 건설을 추진하는 종교운동을 천년왕국운동이라 한다면, 무격들이 천년왕국운동에 동참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1687년(숙종 13) 해주 무격이 처형당한 승려 처경(소현세자 유복자로 자처)과 허견을 배향하면서 사람들을 규합(숙종 13년 4월 정축)

○ 1688년(숙종 14) 이용석이 신령스런 무격이라 하며 사람들을 규합하다 처형(숙종 14년 11월 기묘)

○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이 미륵이라 자처하고 무녀 정계화를 정성인으로 받들고 거사하려던 사건95)최종성 외, 『국역 역적여환등추안』, 민속원, 2010.

○ 1691년(숙종 17) 장단 무격 금영하가 거사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

○ 1691년(숙종 17)의 수양산 생불출현사건, 황해도 무격 차충걸과 조이달·처 애진이 한양은 망하고 전읍이 흥한다고 하면서 수양산의 생불 정필석(가공 인물)을 영입해서 한양을 침공하려던 사건(숙종 17년 11월 을해)

○ 1718(숙종 44) 무격이 성인과 공자를 자처하며 주문 부적으로 치병(숙종 44년 윤8월 병진).96)高成勳, 「肅宗朝 變亂의 一端-首陽山 生佛 出現說을 중심으로」, 『南都泳博士古稀紀念 歷史學論叢』, 민족문화사, 1993, pp.405∼425.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 후기 사회의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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