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2. 고려 이전의 무속의례
이용범

청동기시대에 이미 한국 사회에는 무당과 같은 종교전문가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무덤에서 발견되는 청동방울이나 거울은 오늘날 무당들이 사용하고 있는 무구(巫具)들이다. 농경문청동기, 방패형동기(銅器), 이형동기(異形銅器) 역시 종교적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의기(儀器)로 여겨진다. 아울러 오늘날 굿이나 마을의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간(神竿)이나 당산나무·서낭목·솟대 등의 원형적인 모습이 단군신화의 신단수나 마한의 소도, 농경문청동기에 나타나 있다.

함북 무산 호곡리, 경남 김해 부원동과 봉원동 유적,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과 같은 청동기 내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복골(卜骨), 즉 점을 치는데 사용되는 짐승의 뼈 역시 그러한 점복을 행하는 특수한 기술이나 능력의 소유자인 종교전문가의 존재를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수렵, 어로와 관계된 것으로 여겨지는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나형(裸形) 인물상 역시 수렵의례를 주관하는 종교전문가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마도 무당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종교전문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보다 사회 적 차원에서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형태의 어떤 의례를 행하였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무당의 명칭과 그들의 활동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자료이다. 즉, 삼국시대부터 비로소 무당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물론 자료의 소략함으로 당시 사회에서 무당들의 활동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두 자료에서 나타나는 무당 담당 의례는 기이한 사건에 대한 해석과 미래의 일에 대한 점복, 치병(治病), 죽은 자와의 소통 등이다. 기이한 사건을 해석하고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은 점복의 범주에 든다. 치병과 죽은 자와의 소통은 질병, 죽음과 같은 삶의 문제의 발생을 전제한다. 따라서 치병과 죽은 자와의 소통 행위는 기양의례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런 점에서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고려시대 이전 무속의례는 점복과 기양의례이다.

기복의례 역시 당연히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아니면 이 시기에는 가정과 지역사회, 국가와 왕실의 포괄적인 복을 비는 기복의례는 무속의례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의례로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기에는 일상적이지 않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해석의 역할을 무당이 담당하였다. 고구려 차대왕(次大王) 3년(148)에 왕이 사냥을 나갔을 때 흰 여우가 따라온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무당이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평유원(平儒原)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어서 왕이 [활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무당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여우라는 것은 요사스런 짐승이어서 상서로운 조짐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색이 희니 더욱 괴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말을 간곡하게 할 수 없어서 요괴로 보여 준 것은 임금께서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살펴서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임금께서 만약 덕을 닦으면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흉이면 흉이라 하고, 길이면 길이라 할 것이지, 네가 이미 요사스럽다고 하였다가 또 복이 된다고 하니 무슨 거짓말이냐?” 마침내 그를 죽였다.

흰 여우가 왕을 따라온 사건에 대한 무당의 해석이 흥미롭다. 단순히 길흉을 말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왕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조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비록 죽임을 당하긴 했지만 당시 무당은 왕의 곁에서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멸망 전에 나타난 흉조에 대해서도 역시 무당이 그 의미를 밝히다가 죽임을 당한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게 했더니, 세 자[尺]가량의 깊이에 한 마리의 거북이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月新]과 같다.”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여기서도 무당은 그러한 흉조가 상징하는 나라의 앞날에 대해서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거짓으로 흉조를 길조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무당은 죽음을 당하지만 국가의 앞날에 대한 발언을 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무당은 지금의 무당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앞날을 점치는 점복을 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을 낳은 주통촌(酒桶村)의 여인인 소후(小后)가 아직 자기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무당은 태어날 아이가 왕후가 될 것을 점친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13년(209)의 기록을 보자.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산상왕]은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뒤이을 아들을 나에게 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교제(郊祭)에 쓸 돼지의 일에서 시작되어 그 어미를 침석에 들게 하였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라 하고 그 어미를 소후로 세웠다. 이전에 소후의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낳기 전에 무당이 점쳐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고 낳은 후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하였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무당이 점복을 통해 국가의 앞날에 대해 말하거나 왕의 정치행위에 대한 조언 등을 하는 역할은 약화된다. 무당의 점복은 국가의 앞날을 점치거나 왕의 정치를 판단하는 사회 전체 수준에서의 역할은 쇠퇴하고, 동천왕의 탄생을 점치는 것처럼 점차로 개인의 삶의 차원에서 기능하게 된다. 동천왕의 탄생을 점친 것은 비록 왕과 관련된 점복이지만 왕의 통치와 관련된 것이기 보다는 한 개인으로서의 왕에 대한 것이다.

이 시기 무당들의 역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치병의례의 담당이다. 먼저 고구려 유리왕(瑠璃王) 19년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다.

가을 8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교시를] 찾아내어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을 어떻게 상하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이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사과하니 곧 병이 나았다.

여기서 무당은 병의 원인이 죽은 사람의 원혼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다. 왕은 사과를 통해 병에서 벗어나는데, 그 사과 행위는 아마도 무당이 담당했을 것이다. 죽은 자에게 사과하여 죽은 자를 달래는 것이 당시 치병의례의 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를 보면 승려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고자 신라에 왔다가, 미추왕의 공주인 성국공주(成國公主)를 치료한다. 그 결과 아도는 왕실의 후원으로 불법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도 전에 성국공주를 치료하다 실패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가 바로 무당[巫醫]이다. 무의란 용어가 치료자로서의 무당이 아니라 무당과 의사를 나타낼 수도 있으나, 이 기사는 무당이 당시 치병의례를 담당한 존재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는 승상 김양도(金良啚)가 어린 시절 귀신에 의해 병이 들었는데 밀본(密本)법사가 귀신을 물리쳤다는 『삼국유사』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승상 김양도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매양 한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서 집안의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을 보았다.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곧 무리가 모여서 다투어 희롱하였다.

여기서 무당이 행한 제사는 당연히 귀신을 물리쳐 병을 치유하는 무속의 치병의례였을 것이다.

또한, 무당은 죽은 자의 말을 산 사람에게 전달하여 산 자와 소통시킨다. 산상왕의 왕후인 태후 우씨(于氏)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왕후였는데, 고국천왕 사후 다시 동생인 산상왕의 왕후가 되었다. 태후 우씨가 사망했을 때 우씨는 산상왕의 곁에 묻힌다. 그런데 이미 죽은 자인 고국천왕이 우씨의 처사에 분개하여 우씨와 싸우고 그 부끄러운 마음을 무당을 통해 전달한다.

동천왕 8년(234) 가을 9월에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는 임종 시에 유언하였다. “내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였으니 앞으로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을 뵈올 것인가? 여러 신하들이 만약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 마침내 그 유언대로 장사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이 내게 내려와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우씨가 산상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더불어 싸웠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이리하여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무당은 이처럼 죽은 자의 의사를 산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산 사람들의 바람을 죽은 자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즉,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하여 요동성을 공격할 때 성 안의 주몽(朱蒙) 사당에 여인을 장식하여 주몽의 부인으로 삼아 당나라의 공격을 물 리치고자 하는 사례를 통해 나타난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신의 부인으로 삼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제시된 사례가 통일신라 때까지의 무속의례 자료의 전부이다. 비록 대단히 작은 수의 사례이지만, 비일상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미래에 대한 점복, 치병 및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소통과 같은 기양의례 등 무속이 기본적으로 담당하는 역할과 의례의 유형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례는 국왕과 국가, 왕실, 개인 등 다양한 대상을 향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가나 국왕을 대상으로 한 무속의례는 1∼3세기의 삼국시대 초기에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에 무당은 국가나 국왕 관련 사건을 해석하고 점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흰 여우가 활에 맞지 않는 것을 빗대어 왕에게 덕을 닦으라고 요구했다가 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무당의 권위와 영향력은 이미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특히, 국가나 왕실 관련 사건에 대한 해석이나 점복 행위는 이미 이 시기에 무당이 독점하지 못하고, 일자(日者)나 일관(日官)·점자(占者) 등 다른 전문가들과 그 역할을 분점하고 있었다.

백제의 경우 이미 온조왕(溫祚王) 25년(7)에 왕궁의 우물에서 물이 넘치고 민가에서 말이 머리는 하나고 몸이 둘인 소를 낳는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일자이다.

25년 봄 2월에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漢城)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일자(日者)가 말하였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구려에서도 차대왕(次大王) 4년(149)에 별이나 천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일자가 담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5월에 다섯별이 동쪽 방향에 모였다. 일자가 왕이 화를 낼 것을 두려워하여 속여서 알려 말하기를 “이는 임금의 덕이고 나라의 복입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복에 대한 무당의 독점적 위치는 약화되어간다. 그리고 기이하거나 신이한 사건, 천체의 이변 등에 대한 해석에서도 일자나 일관에게 그 역할을 내주고, 무당은 점점 공적인 역할에서 멀어진다.

신라의 경우에도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태양 빛이 약화되었을 때 그에 대한 해석과 처방을 내는 것은 일관이다. 진흥왕 순수비인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보더라도 승려와 점인(占人), 약사(藥師)는 왕을 따르지만 무당은 그렇지 않았다. 치병의례에서도 불교 치병의례가 무속 치병의례의 라이벌로 기능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을 지칭하는 ‘거서간’이라는 명칭이 신에 대한 의례를 담당하는 무당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무당은 국가로부터 이전과 같이 존중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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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 남해왕(南解王)이 시조묘를 세우고 자신의 누이 아로(阿老)에게 시조묘 의례를 주관하게 한 것으로 드러나듯, 삼국에서 행해진 하늘과 땅, 산과 강, 시조를 대상으로 한 국가적 의례나 희생제의에 무당은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이미 무속은 국가적 차원의 의례를 담당하지 못하였고, 점복이나 치병 등의 기능에서도 독점적 위치를 상실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무속의례가 어떤 형식을 갖추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고국천왕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둣이, 신내림[降神]이 무속의례의 중요한 메카니즘으로 작용하였음은 확인된다. 또한, 무속의례의 대상이 되는 신이 어떤 신들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고구려 유리왕과 고국천왕, 신라의 김양도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듯이, 죽은 자의 혼과 사람에게 병을 일으키는 일종의 사귀(邪鬼)가 당시 무속의례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내림은 오늘날 무속의 굿에서도 신과 인간의 핵심적인 소통 메카니즘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죽은 자의 혼은 물론이고, 비록 물리침의 대상이기는 하나 사귀류의 잡신 역시 오늘날 무속의 굿에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한국 무속의례 형식의 일부가 이미 이 시기부터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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