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3. 고려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가. 치병의례
이용범

치병은 무당이 담당하는 일반적 기능의 하나이고 치병의례는 현재에도 여전히 행해지는 중요한 무속의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고려시대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는 평소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이 나도 약을 먹지 않으며, 부자 사이 같이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저주와 염승(厭勝)을 알 따름이다”고 한 것처럼, 치병 관련 의례가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우왕이 장단(長湍)에 갔을 때, 기생 5, 6명에게 한꺼번에 복통이 발생하자 술과 고기로 감악산(紺嶽山)에 제를 올렸다는 사실은 고려시대의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무당에 의한 치병의 대표적인 사례는 인종 24년(1146)에 왕의 병에 대해서 무당이 원인과 치유방법을 제시하자 왕이 그것을 따른 것이다.

병진에 무당들이 말하기를, “척준경(拓俊京)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척준경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소환하여 벼슬을 주었다.

경신에 무당의 말에 의하여 내시 봉설(奉說)을 보내어 김제군(金堤郡)이 신축한 벽골지(碧骨池)의 제방을 끊게 하였다.

무당의 말을 듣고서 죄를 짓고 죽은 자를 신원(伸寃)하여 벼슬을 돌려주고 자손에게까지 벼슬을 내리며, 한 지역에서 신축한 저수지의 제방을 허물었다는 사실은 무당의 말에 대한 신뢰가 작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인종이 병으로 인해 무당과 의원의 방술(方術)을 찾음이 한두 번이 아니며, 신성한 영(靈)에 빈 일 또한, 이미 많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를 인종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사례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당의 신내림을 통한 말에 대한 당시 고려사회의 진지한 반응을 고려할 때, 이는 일반적 상황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충렬왕 2년(1282) 7월에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에게 병이 있자 원나라에 관리를 보내 의원과 함께 무당을 청한다.

경신에 산원 고세(高世)를 원나라에 보내 의원[醫]과 무인[巫]을 청하였다.

병술 초하루에 고세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병은 무인(巫人)이 낫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의사는 이전에 이미 연덕신(鍊德新)을 보냈으니 어찌 반드시 다른 의사여야 하리오.”하고 다만 약물(藥物)만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요청에 대해 원나라는 약만 보낸다. 비록 원나라로부터 약만을 받았지만, 이처럼 의원과 함께 무당을 청한 사실은 역시 고려사회에서 무당의 치병 기능이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종 45년(1258)에 홍복원(洪福源)은 영령공(永寧公) 왕준(王綧)을 저주하는 행위를 한다.

홍복원이 비밀히 무(巫)를 시켜 나무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못을 박아서 땅에 묻고 혹 우물에 넣으며 주저(呪詛)하였다.

저주의 사실이 발각되자 홍복원은 “아이의 병이 혹독한 고로 이를 써서 풀리게 하였을 뿐이요 다른 뜻이 있음은 아니다.”고 변명한다. 이러한 변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당에 의한 치병이 일상적인 행위였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행해진 무속 치병의례의 사례는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치병과 관련해서 무속의례 외의 다양한 의례가 행해졌다. 병이 발생하면 불교, 도교의례에 의존하는 것은 물론 신사(神祠)나 산신, 온신(瘟神)에게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거처를 옮기는 피병(避病) 등의 행위를 하였다.

고려시대는 무속은 물론이고 유교·불교·도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였던 다종교사회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종교에 의존하는 다양한 치병의례가 행해졌을 것이다. 민간의 치병의례 역시 다양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 치병의례는 여러 치병의례 가운데 하나로 기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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