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3. 고려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나. 기우제
이용범

어느 시대에서나 비[雨]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였고, 따라서 기우에 대한 관심은 고대부터 엿보인다. 이는 이미 단군신화에 기우를 담당하는 존재인 우사(雨師)가 나타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적당한 양의 비를 비는 기우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우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가뭄이 국가와 사회 전체의 문제인 만큼 국가나 지역 전체의 의례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도 다양한 기우제가 국가 차원에서 행해졌다. 왕은 원구에서 기우제를 행하였다. 또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의거하여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는 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견책(譴責)으로 여겨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식의 수를 줄이거나 죄수를 사면하고 토목공사를 중지하며 백성의 구휼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근신과 절제의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고려 선종(宣宗)은 5년(1088) 4월에 신하들과 함께 남교(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고서 “정전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줄이며 음악을 거두고 노천에 앉아 정사를 처리하였다.” 또한, 시장을 옮기거나 왕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양산·삿갓·모자·부채 등의 사용을 금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원구·종묘·사직은 물론이고 명산대천에 기우를 빌었고, 기우 관련 불교 도량을 개설하거나 도교의례인 재초(齋醮)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우제에는 왕과 관리는 물론이고 승려나 도사와 같은 종교 전문가가 참여하였다.

그런데 무속의례 방식에 의한 기우제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현종 12년(1021) 5월에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드리기 시작하여 공민왕 때에 이르기까지 총 29회의 무속의례 방식에 의한 기우제가 행해진다. 인종 때에는 9회의 무속의례 방식의 기우제가 있었고, 충렬왕과 충숙왕 때에는 각각 5회, 명종 때에는 3회, 고종 때에는 2회가 있었다. ‘취무도우(聚巫禱雨)’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무속의례 방식의 기우제는 많은 수의 무당을 동원하는 방식의 기우제로서 많은 경우 300명의 무당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무당을 모아 행하는 기우제의 기간은 명확하지 않다. 『고려사』에는 비가 오면 중단하거나 3일, 6일 동안 행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하루만에 끝나기 보다는 3일 길게는 6일까지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충숙왕 16년(1329) 5월 정묘에 행해진 기우제는 “무당들을 모아 6일 간이나 기우제를 올리니 무당들이 괴로워하여 모두 도망쳐 숨었다. 그래서 민가를 두루 뒤져서 잡아갔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행해진 무속의례 방식에 의한 기우제는 무당들로서는 고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무당을 불러 진행한 기우제에 대한 기록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취무도우(또는 集巫祈雨)’이 고, 또 하나는 ‘폭무기우(曝巫祈雨)’이다. 또한, ‘취무도우’의 경우 토룡(土龍)을 만들었다는 말이 같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토룡을 만들고 아울러 무당을 모아 기우를 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토룡을 만들고 무당을 모아 기우한 토룡기우제를 세 번째 기우 유형으로 볼 수 있다.

토룡기우제란 흙으로 용을 만들고 그렇게 형상화된 용을 대상으로 기우제를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이나 흙 등으로 용을 형상화하여 비를 비는 기우제는 이미 신라 때부터 행해졌고 근대에도 행해졌다. 무당을 동원한 고려시대 토룡기우제의 구체적인 의례행위가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근대에 행해진 토룡기우제를 통해 짐작은 가능하다.

1930년대에 행해진 토룡기우제는 다음과 같이 행해졌다. 토룡기우제는 산천에 대한 기우의 효험이 없어졌을 때 진행되었다. 천변(川邊)으로 시장을 옮기고 도로에 토룡을 만들어 무당과 판수(判數), 승려가 진행하였다. 무당은 용의 머리 부분에서 기우를 기원하고, 용의 몸통 부분에서는 판수가 북을 치며 독경을 하고, 용의 꼬리 부분에서는 승려가 염불을 하였다. 고려시대 토룡기우제에는 근대에 행해진 토룡기우제와는 달리 무당만 참여하고 있지만, 비를 가져올 수 있는 용을 형상화하여 기우를 기원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토룡기우제는 용을 대상으로 단순히 비를 기원하는 성격의 의례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무당이 춤과 음악을 통해 용이 비를 내리도록 강요하는 의례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행해진 기우제에서 토룡처럼 기우제를 위해 형상화되고 만들어진 용에 대해서 ‘기원과 존중의 태도’가 아닌 ‘놀림과 강요의 태도’가 발견되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토룡기우제는 좁은 의미의 ‘기원’보다는 ‘의례적 강요(ritual coercion)’가 중심 모티프를 이루는 의례였다.

‘폭무기우’는 무당들을 땡볕에 오랫동안 있도록 하는 기우방식이다. 폭무기우에 동원된 많은 무당들에게 하루나 사흘, 길게는 6일 동안 햇볕 아래 있는 일은 대단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충숙왕 16년(1329) 5월 정묘에 행해진 기우제 때 무당들이 도망을 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폭무기우는 신과 통하는 무당들에게 고통을 가하면 하늘이 이를 가엽게 여겨 비를 내릴 것이라는 사고를 전제한다. 결국 폭무기우는 무당을 희생양으로 가뭄이라는 공동체의 재난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충숙왕 16년 5월의 기우가 『고려사』에는 ‘聚巫禱雨六日’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실제 기우방식은 폭무기우의 방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聚(集)巫禱(祈)雨’로 기록된 기우제 역시 폭무기우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토룡기우나 폭무기우의 방식이 아닌 또 다른 기우제의 유형으로서 ‘취무도우(또는 집무기우)’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러한 기우제의 구체적인 방식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무당이 진행하는 무속의례가 기본적으로 가무를 중심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기우제 역시 그렇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중종 35년(1540) 5월 신축의 『중종실록』 기사는 취무도우형 의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주례』에 우제(雩祭)를 지내면서 무당들이 춤을 추고 노래도 하고 곡(哭)도 했다고 한 것은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위로 하늘에 알리려는 뜻이었습니다. 전조 때에는 도성(都省)에서 거행했었습니다.

이 기사는 취무도우형 기우제가 춤과 노래, 간절한 호소를 통해 기우를 비는 의례임을 추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중 국에서도 행해진 전형적인 기우제의 한 형식을 따른 것임을 말해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