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3. 고려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다. 기복의례
이용범

기복의례란 한 가정이나 지역, 왕실, 국가의 포괄적인 복을 기원하는 의례이다. 대체로 일정한 시기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특징을 갖는다. 고려시대 무속 기복의례의 대표적인 사례는 기은(祈恩)이다.

기은은 왕실과 국가뿐만 아니라 민간에 의해서도 행해졌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은은 왕실과 국가의 안과태평을 위해 명산대천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행해졌던 의례이다. 별기은(別祈恩)은 이러한 기은의 한 형태로, 정기적인 의례이기보다는 일상적인 상황이 아닌 특별한 상황에 행해지거나 정해진 의례 외에 별도로 더 행해진 의례를 말한다.

이러한 국가와 왕실에 의한 이른바 국행(國行) 기은의례는 명산대천에 복을 비는 의례라는 점에서 이전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기은’의례로 규정되어 나타난 것은 고려시기부터이며, 조선 말까지도 이어진다. 별기은 역시 성종 원년(982) 최승로(崔承老)가 시무 28조에서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왕실이 별례기제(別例祈祭)를 지내지 말자는 제안을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초기부터 행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의 기은의례에서 무당이 중심적인 의례 주체로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이다. 이전에는 불교의례나 도교의 재초 형식으로 행해졌다. 의종 22년(1168)에 ‘별기은사사(別祈恩寺社)’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때 의종은 불사(佛事) 중흥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별기은사사의 수리를 명한다. 따라서 이때 별기은은 불교와 관련된 의례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종 24년(1170)에 노인성 재초를 위해 별기은소(別祈恩所)를 세우는 것을 볼 때 별기은은 또한, 도 교의례 형식과도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기은과 무속의 관련성은 13세기 초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고려 신종(神宗) 5년(1202)에 대장군이 된 정언진(丁彦眞)은 경상도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을 진압하러 가서 기은을 위해 성황사에 들른다. 그가 찾아간 성황사에서 기은을 담당한 존재는 무당이었다. 그리고 이 성황사에 민란의 주동자도 기도를 위해 찾아왔고, 정언진은 무당을 이용해 반란의 주동자를 술로 취하게 하여 잡는다. 이 사례는 이 시기 성황사에서 이뤄진 기은에 무당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위의 사례는 국가에서 행한 기은은 아니다. 국행제로서의 기은에 무당이 참여하는 것은 공양왕 3년(1391) 김자수(金子粹)의 상서를 통해 확인된다.

불법의 설도 오히려 가히 믿지 못하거든 하물며 괴이하고 황당무계한 무격이야. 국중에 무당을 세워 이미 불경(不經)하옵거늘 이른바 별기은이라 하는 곳이 또한, 10여 소를 넘으니, 사시(四時)의 제사와 때도 없는 별제에 이르기까지 1년의 비용이 가히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제사의 때를 당하여 비록 금주(禁酒)의 령이 바야흐로 엄하나, 모든 무당이 떼를 지어 국행(國行)이라 칭탁하매 해당 관사가 감히 힐난치 못한 고로 술마시기를 태연히 하고 번화한 거리에서 북치고 나팔을 불며 가무하여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풍속의 아름답지 못함이 이렇듯 심합니다.

이 기사는 당시에 무당이 중심이 되어 행해지는 국행 별기은이 적어도 10곳에서 이뤄졌고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1년에 4번 정기적으로 행해질 뿐만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더 행해졌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무속 국행제는 악기를 연주하며 음주가무의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양왕 때의 기은이 모두 무속 의례방식으로 행해지지는 않 았다. 공양왕 2년(1390) 9월의 기록을 보면,

매 사시에는 반드시 13소(所)에서 기은(祈恩)하는데 도량(道場)이라 하고 법석(法席)이라 하고 별기은(別祈恩)이라 하여 신불(神佛)에 첨사(諂事)하였다. 대신과 대간이 매양 논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공양왕 당시의 기은이 불교적인 방식으로도 이뤄졌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때의 별기은은 무속의례의 방식으로 행해진 기은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에 기은은 불교와 무속의 방식으로 행해지지만, 별기은은 거의 무속적인 방식으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양왕 당시의 기은처 10곳, 13곳이 어딘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8곳은 확인된다. 그곳은 덕적(德積)·백악(白岳)·송악(松岳)·목멱(木覓)·감악(紺岳)·개성 대정(大井)·삼성(三聖)·주작(朱雀)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고려시대에 행해진 이러한 명산대천에 대한 기은은 국행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도 복을 빌기 위한 기은은 널리 행해졌다. 충선왕 3년(1311) 4월에 감악산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금하였다. 이는 “이 때에 귀신을 숭상하여 공경(公卿) 사서(士庶)가 모두 친히 감악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혹은 장단(長湍)을 지나다가 익사하는 자가 있어 헌사(憲司)가 상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와 왕실은 물론 민간에 이르기까지 공식적, 비공식적인 기은의례가 행해졌음을 알려준다.

앞에서 말한 정언진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고려시대의 기은은 명산대천뿐만 아니라 성황을 대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황에 대한 기은은 무속의례의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정언진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당시 성황사를 담당한 것이 무당이었 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성황사를 무당이 담당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함유일이] 삭방도 감창사(朔方道監倉使)가 되었을 때 등주(登州) 성황신(城隍神)이 자주 무당에게 강신(降神)하여 기이하게도 국가의 화복을 맞혔다. 함유일이 사(祠)에 가서 국제(國祭)를 행하는데 읍(揖)하고 배(拜)하지 않으니, 유사(有司)가 임금의 뜻을 맞추어 탄핵하여 파면하였다.

권화(權和)는 신우 때에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는데 고성(固城)의 요민(妖民)인 이금(伊金)이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중인을 미혹하게 하여 말하기를……우민(愚民)들이 이를 믿고 쌀과 베, 금은(金銀)을 베풀어 주되 죽을까 두려워하며 말과 소가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돈이 있는 자는 다 사람에게 주었다. 또 이르기를, “내가 산천의 신을 신칙하여 보내면 왜적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하니 무격이 더욱 경신(敬信)을 더하여 성황의 사묘(祠廟)를 걷어치우고 이금(伊金)을 섬기기를 부처와 같이 하여 복리(福利)를 빌었다.

등주 성황신이 무당에게 자주 강신해서 국가의 길흉을 말한다는 것은 등주 성황사와 무당이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금의 말에 현혹되어 성황사를 걷어치고 이금을 부처처럼 섬겼다는 두 번째 기록 역시 무당들이 성황사를 담당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다른 신당이나 신사(神祠)의 경우도 그런 사례가 있다. 무당에게 강신하여 “진도(珍島), 탐라(耽羅)의 정벌에 있어 내가 실로 힘이 있었는데 장사(將士)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는 녹을 주지 않음은 어찌함이냐 반드시 나를 정령공(定寧公)으로 봉하라.”라고 말하거나, 역시 장성의 여자에게 내려서 “네가 금성신당(錦城神堂)의 무(巫)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너의 부모를 죽일 것이라.”하여, 그 여자가 무당이 되도록 한 금성산신이 모셔진 금성산 신당은 좋은 예이다.

태백산 무녀의 아들이라는 이숙(李淑)의 사례나 강융(姜融)의 누이가 송악사(松岳祠)에서 기식하였다는 사실 또한 무당들이 성황사나 산신당을 담당하고 의례를 관장하였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처럼 무당이 당(堂)을 관장하고 무당을 통해 성황신과의 소통이 이뤄지는 경우, 등주 성황사의 국행제에서 함유일이 절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드러나듯, 국행제라 할지라도 무속의례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