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3. 고려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형식
이용범

고려시대 무속의례를 이해하는데 당시에 행해진 무속의례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러한 무속의례들이 어떤 형식으로 행해졌는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주로 국가와 왕실에서 행해진 것이지만, 고려시대에 행해진 무속의례에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말하는 자료는 상당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당시 무속의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여러 유형의 무속의례가 행해졌고, 12세기 초반부터 무당 축출론 같은 무속 금압책이 나올 정도로 무속의례가 성행했다는 점에서 당시에 일정한 형식의 무속의례가 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무속에 관한 자료 중 이규보의 「노무편」은 12세기말 경 민간에서 행해진 고려시대 무속의례의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어 이를 통해 당시 무속의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노무편」을 보면 당시 무당들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일반인들과 함께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굿이 무당의 집에서 이뤄졌으며 굿에 대한 별다른 제약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노무편」의 서문을 통해 이를 살펴 보기로 하자.

내가 살고 있는 동쪽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모이는데, 그 음란한 노래와 괴상한 말들이 귀에 들린다. 내가 매우 불쾌하긴 하나 몰아낼 만한 이유가 없던 차인데, 마침 나라로부터 명령이 내려 모든 무당들로 하여금 멀리 옮겨가 서울에 인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한갓 동쪽 이웃에 음란하고 요괴한 것들이 쓸어버린 듯 없어진 것을 기뻐할 뿐 아니라 또한, 서울 안에 아주 이런 무리들이 없어짐으로써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들이 순진하여 장차 태고의 풍속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며, 이런 뜻에서 시를 지어 치하하는 바이다.

이 서문을 보면, 이규보는 개경에 있는 무당집에서 매일 벌어지는 무당굿이 못마땅했으나 개인적으로 금할 방법이 없었던 차에 국가의 무속 금압책으로 무당이 서울에서 축출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 따라서 무당 축출이 있기 전까지는 무당들이 개경에 거주하면서 자유롭게 자기 집에서 굿을 할 수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것과 함께 앞에서 살펴본 기은이나 별기은이 명산대천의 당(堂)이나 성황사에 행해졌다는 것을 함께 감안한다면, 고려시대 무속의례는 무당집과 명산대천의 당이나 성황사 등의 공간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당의 집이 아닌 굿을 의뢰한 일반 사람의 집에서도 굿을 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는 않는다.

또한, 무당은 자신의 집에서 굿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에 개인 신당을 꾸며놓고 있었다. 무당집에서 굿을 할 경우 무당 집에 마련된 무당의 개인 신당에서 굿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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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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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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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얽어 다섯 자 남짓 감실 만들어

입버릇삼아 스스로 제석천이라 말하지만

제석천황은 본래 육천(六天) 위에 있거늘

어찌 네 집에 들어가 궁벽한 곳에 머물겠느냐

온 벽에 단청하여 신의 형상을 그리고

칠원구요(七元九曜)라고 써 붙였지만

성관(星官)은 본래 먼 하늘에 있거늘

어찌 너를 따라 너의 벽에 기거하랴.

무당 집에 모신 신당은 제석을 모신 감실과 칠성과 구요 등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로 이뤄져 있다. 이를 통해 12세기 말 당시에 무속의례에 불교의 신인 제석은 물론이고 도교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칠성, 구요 등의 신이 무속의 신의 하나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제석은 이른바 ‘요언’을 하는 무당들에게 두루 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시기부터 무속의 중심 신격으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불교 와 도교의 신들은 무속과 불교, 도교와의 교섭을 나타내며, 이러한 모습은 현재 한국 무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한편, 이 당시에 신들을 무신도, 즉 그림으로 표상하는 방법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노무편」은 당시 굿이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음주가무와 공수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굿에는 밥이나 떡 같은 음식은 물론이고 옷이 주된 제물의 하나로 바쳐졌음을 알려 준다.

내가 살고 있는 동쪽 이웃에 늙은 무당이 있어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모이는데, 그 음란한 노래와 괴상한 말들이 귀에 들린다. ……

구름같이 모여든 남녀 문에 가득하고

나갈 때는 어깨 비비고 들어올 땐 목을 맞댄다

목구멍 속의 가는 말은 새소리 같은데

늦을락 빠를락 두서없이 지껄이다가

천 마디 만 마디 중 요행 하나만 맞아도

어리석은 남녀는 더욱 공경히 받든다

단술 신술로 스스로 배를 채우고

몸을 일으켜 펄쩍 뛰면 머리가 들보에 닿는다 ……

사방 남녀의 먹을거리 몽땅 거둬들이고

온 천하 부부의 옷 모조리 탈취한다 ……

장구[瓦鼓]치며 시끄러운 소리 내 귀에 들리지 않으리.

무당굿에서 남녀가 모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규보 당시의 굿도 출입할 때 어깨를 비비고 목을 맞대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남·녀 구분없이 모인 상태에서 이뤄졌다.

굿은 노래와 춤, 공수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규보가 말한 ‘음란한 노래’는 요즘 굿에서 나타나는 ‘무가(巫歌)’로 보인다. ‘괴상한 말’과 “천 마디 만 마디 중 요행 하나만 맞아도 어리석은 남녀는 더욱 공경히 받든다”는 것은 무당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신의 말인 공수를 가리킨다. 또한, 무당이 굿에서 춤을 추는데, 이규보의 눈에는 머리가 들보에 닿을 정도의 ‘도무’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노래와 춤이 있는 굿판에 음악이 빠질 수는 없다. 「노무편」이 묘사하는 굿에는 장구가 등장한다. 이때 장구는 와고(瓦鼓)이다. 요즘 장구의 몸통은 보통 오동나무로 만들지만 예전에는 장구의 몸통을 사기나 기와 등으로도 만들었고 이를 와고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장구 외에 다른 악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당시 개경에서 행해지던 굿의 일반적 특징인지, 아니면 이규보가 묘사한 굿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상황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무당굿의 제물로 술과 음식, 옷이 바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술 신술로 스스로 배를 채우고”란 구절과 “사방 남녀의 먹을거리 몽땅 거둬들이고 온 천하 부부의 옷 모조리 탈취한다.”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살펴본 결과 「노무편」에서 이규보가 묘사한 굿은 오늘날 경기 이북 지방의 굿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현재 경기 이북 지방의 무당들은 자신의 몸주신을 모신 개인 신당을 갖고 있다. 그들은 교외의 굿당에서 굿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신당에서도 굿을 한다.

그리고 그들 굿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는 춤과 노래, 공수이다. 무당들은 춤과 노래, 공수를 통해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매개체로서 역할한다. 또한, 굿에는 장구와 같은 타악기와 피리같은 선율악기가 동원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장구와 같은 타악기와 아울러 피리 같은 선율악기가 동반되는데, 「노무편」의 굿에는 타악기만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굿을 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준비하는데 이 역시 오늘날의 굿과 동일하다. 다양한 과일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굿의 중심 제물은 밥과 떡 같은 음식과 술, 신과 조상을 위해 준비하는 천이나 포, 옷이다. 제물의 측면에서도 「노무편」의 굿은 오늘날의 굿과 거의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미 12세기 말경에는 무속의 신, 춤과 노래·공수를 중심으로 한 굿의 진행, 굿에 수반되는 악기, 신에게 바치는 제물 등 제반 측면에서 현재 경기 북부 굿의 전형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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