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4. 조선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가. 치병의례
이용범

인간의 질병은 보편적인 삶의 문제의 하나이다. 의약의 공급이 충분치 못하고, 조선시대 당시의 공식종교인 유교에는 치병의례가 없었기 때문에 질병에 걸렸을 경우 무속의 치병의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왕실이나 양반가, 일반 민중들 모두에게 동일한 상 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무속의 치병의례에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가 벽에 붙혀 놓은 그림이다.

민제는 타고난 자품(資稟)이 온인청검(溫仁淸儉)하여, 경사(經史)에 마음을 두고 가산(家産)은 일삼지 않았다. 이단을 배척하고 음사를 미워하여, 화공을 시켜 노복이 막대기를 가지고 개[犬]를 시켜 중과 무당을 쫓는 그림과 약(藥)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제하는 모양을 벽에 그려 놓고 보았다(『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9월 15일).

이 그림이 약으로 사람을 구하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이 무속의례 그중에서도 치병의례에 많이 의존하였음을 보여준다. 치병의례는 불교에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속의 치병의례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중종 때 이조판서였던 이계남(李季男)이 풍병이 들자 가족들이 무당을 시켜 빌었다든지, 광해군 때 우찬성 이충(李沖)이 아프자 가족들이 무속의 치병의례를 비롯한 여러 기양(祈禳)의례를 행했다든지 하는 사실은 양반 사대부가에서도 무속의 치병의례를 행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미 세조 2년(1456) 5월에 세조에 의해서 지적된 바 있다. 세조는 ‘공가(公家)’에서 무녀에게 병을 고치게 하면서 백성들의 사신(祀神) 행위를 금할 수 있겠냐면서 이른바 음사(淫祀)에 대한 금지를 반대한다.

이러한 상황은 성종 5년(1474) 한계희(韓繼禧)가 편찬한 침구서(針灸書)인 『중간신응경(重刊神應經)』 서문의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병든 자들이 생사(生死)와 요수(夭壽)를 모두 무당이나 음사에 맡기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시 대에 여러 의약서를 편찬하고자 한 것도 무속 치병의례에 의존하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확대보기
중간신응경
중간신응경
팝업창 닫기

또한,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보면, 그가 무녀를 불러 손자, 아들, 부인을 위한 다양한 치병의례를 14차례 이상 행했음이 확인된다. 김육(金堉)의 『잠곡필담(潛谷筆譚)』에도 명종 때에 무격이 성행해 사람들이 병에 걸려도 의약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만을 일삼았다는 지적이 나타난다.

확대보기
김육 초상
김육 초상
팝업창 닫기

무속의 치병의례를 통한 치병행위는 민간에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왕실에서도 빈번하게 무속의 치병의례가 행해졌다. 태종 18년(1418)에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 완두창(剜豆瘡)으로 위독하자, 판수를 불러 치병의 성공 여부를 점치고 국무(國巫) 가이(加伊)와 무녀 보문(寶文)에게 치병의례를 행하게 하였으나 끝내 사망하고 만다. 이 일로 무녀 보문은 성녕대군의 노비들에게 맞아 죽기까지 한다.

세종 때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학질에 걸리자 무당에게 별에 대한 제의를 행하도록 하였고, 또한, 세종이 직접 민씨를 데리고 현재 인왕산에 있는 선암(繕巖) 아래 냇가로 행차를 옮겨 무당에게 치병의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종이 아팠을 때 무녀와 궁중 나인들이 성균관 앞에서 굿을 하자 유생들이 쫒아낸 적도 있었다.

성종 때에도 문성왕묘를 다녀 온 성종에게 병이 생기자, ‘공묘(孔廟)’의 신이 빌미가 되었다는 무당의 말에 따라 성균관 대성전 뜰에서 치병의례를 행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저지당하기도 하였다. 인종이 아팠을 때도 무속의 치병의례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선조의 왕후인 인순황후(仁順王后)가 아팠을 때도 역시 무당의 치병의례가 궐내에서 행해졌다. 또한, 숙종이 마마를 앓았을 때도 무녀 막례(莫禮)에 의해 치병의례가 행해졌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병이 발생했을 경우 왕실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속의 치병의례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특히 마마, 즉 천연두와 같은 큰 병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마마에 걸리면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켜야 한다고 여겨졌다. 제사·상가집 출입·연회·성생활·외부사람·기름과 꿀·비린내와 누린내·더러운 냄새 등을 금해야 하는데, 특히 제사와 상장(喪葬)을 꺼린다. 그래서 천연두에 걸리면 바로 제사를 폐지하고 상가에 가지 않았다. 자기가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가에 갔다 온 사람이 오는 것도 금했다. 제사의 경우, 심지어는 천연두가 끝난 지 1, 2년 뒤까지도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행해진 무속의 치병의례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으로 무당이 행하는 치병굿이 있다. 치병굿은 제물을 차리고 병의 원인으로 지적된 존재나 무속의 여러 신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의례이다.

태종 때 마마에 걸린 성녕대군에 대해 무당 보문이 주식(酒食)을 차려 놓고 드린 의례나, 세종 때 원경왕후 민씨가 학질에 걸리자 무당이 별을 대상으로 한 의례, 또한 세종이 직접 민씨를 데리고 인왕산에 있는 선암 아래 냇가에서 무당에게 행하도록 한 치병의례 등이 치병굿의 부류로 보인다.

이러한 치병굿 중에서 규모가 큰 굿이 이른바 야제(野祭)인 듯하다. 야제는 사람이 죽었을 때나 병에 걸렸을 때 행하는 무속 의례이다. 이는 다음의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옵니다. 수령들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 (正長)·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8월 2일).

위의 자료를 보면 야제에는 일단 많은 수의 남녀가 참여한다. 그리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진행한다. 이렇게 성대한 제물을 차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해지는 의례이기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여 집안을 기울게 하는 의례라고 비판되었다.

확대보기
굿에 제물로 바친 돼지
굿에 제물로 바친 돼지
팝업창 닫기

두 번째로 무당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피병(避病)이 있다. 물론 피병은 무당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이 경우 무당은 환자의 생년월일을 보고 피병의 방향과 돌아올 시기를 정해 주었다.

조선시대 피병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행해졌는데,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양가의 부녀(婦女)가 피병(避病)을 위해 무당집에 기거하는 것이었다. 그 경우 그집의 가장은 그 ‘제서위반에 대한 처벌규정[制書有違律]’에 따라 처벌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대명률직해』에 의하면 이때의 처벌은 장 1백대에 처하는 것이었다. 한편, 무당집으 로의 피병은 몸이 아픈 사람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여 병을 전염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비판되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른바 대명노비(代命奴婢)를 무당집에 바치기도 하였다. 이때 대명노비는 환자의 병을 대신하는 일종의 인간 희생양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도 그집의 가장이 그 ‘제서위반에 대한 처벌규정’에 따라 처벌되고, 노비는 관가에서 몰수하도록 규정하였다.

확대보기
병을 치료하는 굿
병을 치료하는 굿
팝업창 닫기

한편, 사람 대신 말을 환자의 대수대명(代數代命)을 위해 바치기도 하였다. 이는 인종 1년(1545) 6월 26일의 사례를 통해 짐작된다.

유시에 사알(司謁) 이수정(李水精)이 정원에 달려와 고하기를 ‘대내(大內)에서 어승 백마(御乘白馬) 세 필을 빨리 안장을 갖추어 들이라는 분부가 있었다.’ 하였다. 승지들이 이수정에게 무슨 까닭이냐고 묻고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고 다만 상께서 병이 위독하다고만 말할 뿐이다. 하인들이 황급히 분주하다가, 잠시 후에 형조판서 윤임(尹任)[윤임은 상의 외삼촌이고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오라버니이다]과 그 아들인 내승(內乘) 윤흥인(尹興仁)이 안장을 갖춘 백마를 끌고 내정(內庭)으로 들어갔다[아마도 여염에서 무당의 말에 현혹되어 병든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대신하게 하는 것처럼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논평한 사관의 기술이 옳다면, 위 사례는 대명노비의 사례와 함께 당시 무속의 치병의례에는 병자의 병을 대신하는 희생물을 바쳐 병을 치유하는 의례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병의 빌미가 된 사람의 시신을 불태우는 방법도 존재 하였다. 태종 8년(1408)에 신효창(申孝昌)은 자기 장인 병의 원인이 먼저 죽은 처남 내외 탓이라는 무당의 말에 따라 처남의 시체를 불태운다.

신효창은 김사형(金士衡)의 사위이다. 김사형의 아들 김육(金陸)과 그 아내 곽씨(郭氏)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사형의 병이 위독하니 무당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육의 부처(夫妻)가 탓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효창이 그 말에 혹(惑)하여 마침내 김육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사헌부에서 신효창을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원종공신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4월 1일).

그런데 성종 5년(1474) 4월 25일에 예조에서 올린 글을 보면, 신효창의 사례가 특수한 사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심한 자는 자신의 질병을 죽은 자의 빌미[祟] 때문이라 하여 심지어는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태워버리는 자까지 있으니, 풍속과 교화가 이렇게 퇴폐하였습니다….

풍속과 교화의 퇴폐를 말할 정도라면, 죽은 자의 시체를 태워 병을 치유하는 것이 무속의 치유의례의 하나로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네 번째로 부적을 넣은 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린 한수원(韓壽遠)의 행장에 이 방법이 나타난다.

경인년(1650, 효종 1)에 종묘서 영에 오르고 외직으로 나가 안성 군수(安城郡守)가 되었다. 본군에는 백성들이 사모하여 세운 사계 선생의 유애비(遺 愛碑)가 있다. 1년의 재임 기간 동안 백성을 구휼하고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 정치를 하여 선조가 남긴 규범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한 요망한 무당이 부적을 넣은 물로 병을 치료한다고 칭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꾀었다. 경외의 사인, 서민들이 모두 휩쓸리어 그가 있는 곳은 시장 같았다. 공이 잡아서 곤장을 쳐 죽이니 듣는 자들이 시원해하였다.

이 방법은 위의 한 가지 사례에 그치고, 속임수로 설명되고 있어서 일반적이지 않은 치유방법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행해진 무속의 치병의례 중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천연두가 걸렸을 때 행하는 마마배송굿이다. 마마배송굿은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천연두가 중국에서 전파되면서 그것의 치료를 위해 형성된 굿으로 보인다.

천연두는 몸에 들어온 지 13일 째에 떠난다고 하는데, 마마배송굿은 천연두를 가져온 두신(痘神)을 잘 내보내는 굿이다. 두신이 나가는 시점은 바로 딱지가 완전히 떨어지는 시점이다. 마마배송굿에서는 말과 마부로 두신이 탈 것을 갖추며, 기타 의장(儀狀)은 벼슬아치들이 외출할 때와 같이 한다. 말이 없으면, 짚으로 만든 말을 대신하였다. 무당을 부를 수 없는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는 제문을 지어 배송하였다. 마마배송굿은 19세기 후반부터 종두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로 사라져 갔다.

확대보기
마마배송굿
마마배송굿
팝업창 닫기

한편, 무당은 이러한 무속의 치병의례를 시행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병의례의 효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했다. 치병의례를 행한 결과 병이 치유되지 않거나 병자가 죽는 등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되었을 경우, 무당은 이에 대한 책임추궁을 받았다. 이는 왕실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는데, 태종 때 무녀 보문은 천연두에 대해 잘못된 치병의례를 행했다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무당들은 전염병이 돌 경우 의원들과 함께 병자를 돌보는 역할도 맡았다. 평소에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병자를 돌보고, 연말에 돌 본 사람의 수만큼 세나 부역을 경감받았다. 그리고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무녀들이 천연두 환자를 찾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무속 치병의례의 시행 외에 무당이 담당한 이러한 역할을 고려할 때, 조선시대 무당은 단순히 종교적 의례를 집행하는 종교전문가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