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4. 조선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나. 기우제
이용범

가뭄의 문제는 조선 사회가 해결해야만 했던 주요 당면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유교·불교·무속 등 어떤 형식의 기우 의례를 통해서라도 가뭄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무속의 기우제는 인조 25년(1647)에 종결될 때까지 조선시대 국행 기우제의 하나로 행해졌다. 명목만 남았던 무속 국행 기우제는 영조 21년(1745)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한 제사 관련 기록인 태상제안(太常祭案)에서조차 삭제된다. 하지만 무속 기우제는 그 이후에도 민간에서 행해져 왔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기우제의 유형이 지속되면서도 아울러 새로운 유형이 나타난다. 고려시대 행해진 기우제 유형 가운데 조선시대에도 지속되는 것은 ‘폭무기우(曝巫祈雨)’형 기우제이다. 물론 폭무기우가 문자 그대로 자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종 7년(1425) 6월 20일의 실록기사를 보면, 그 이전에 무당을 대상으로 폭무기우형 기우제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동중서(董仲舒)의 기우하는 법에 의거하면, ‘도성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 놓는다.’ 하였습니다.”하였 다. 또 계하기를, “무당을 모아서 기우하는데 고열(苦熱)에 솜옷을 입고 화로를 머리에 이게 하는 것은, 신에게 기도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사옵니다. 이후로는 솜옷 입히는 것과 화로를 이는 것을 하지 말게 하고, 3일 동안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기도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무당들을 그저 땡볕에 세워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솜옷을 입고 화로를 머리에 이도록 한 것은 신과 통한다고 여겨지는 무당을 괴롭혀 비를 내리도록 하는 전형적인 폭무기우의 방법이다. 이 시기 이전에 사평부(司平府)나 예조(禮曹)의 뜰 안에 무당들을 모아 행한 기우제는 모두 폭무기우형 기우제로 보인다.

이날 이후 위 기사에서 결정된 데로 기우제가 행해졌다면, 이후 폭무기후형 무속 기우제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무당을 모아 행한 조선시대 기우제는 일반적으로 3일 동안 행해졌다. 이는 무속 기우제에 대한 다른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세종 7년 이후에도 무당을 모아서 행하는 기우제는 계속 나타난다. 그러한 기우제의 경우 폭무기우형 기우제보다 춤과 노래, 간절한 호소를 통해 기우를 비는 기원형 기우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십 명의 무당을 사흘 동안 한 곳에 모아놓고 행하는 무속기우제는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무당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전제로 하늘에 비를 요구하는 의례적 강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폭무기우형 기우제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래에서 서술되는 산천기우형 기우제가 중요해지면서 폭무기우형 기우제는 점차로 약화되어 가는 것이 조선시대 무속 기우제의 주요한 흐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등장하는 무속 기우제는 한강·삼각 산·목멱·송악·개성 대정·백악·덕진·삼성·감악 등 기은의 대상인 산천(山川)에서 행하는 이른바 산천기우제이다. 이러한 산천기우제는 폭무기우형의 기우제이기보다는 별기은처럼 영험한 산천을 대상으로 기우를 기원하는 기우제였다. 그런 점에서 산천기우제는 이른바 ‘기원형 기우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세종 7년(1425) 7월 2일의 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금이 한창 농사철인데 한재(旱災)가 너무 심하옵니다. 옛 제도에 의하여 서울과 기내(畿內) 각처에 봄·가을 별기은(別祈恩)의 관례에 따라 날을 가려 무당과 내시를 보내고 향을 내려 기우(祈雨)하기를 청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산천기우형 기우제는 이미 태종 5년(1405) 5월 11일에 나타난다. 이때는 “여무(女巫)를 모아 송악(松岳)과 개성 대정(大井)에서 비를 빌었다.” 기우제 공간이 밝혀진 조선시대 기우제는 모두 31건이다. 그 중 산천기우형 기우제의 수가 반을 넘는다. 이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영험함이 인정된 산천에 무당을 보내 비를 기원하는 산천기우형 기우제가 새로운 유형으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해 준다.

한편, 석척(蜥蜴) 기우제가 무당을 모아 행하는 취무 기우제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석척 기우제는 무당이 아닌 어린아이들이 담당한다는 인식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음 자료들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뭄으로 인하여 풍운(風雲)·뇌우(雷雨)·산천·삼각(三角)·목멱(木覓)·한강·태일(太一)에 비를 빌고, 각 종파의 중들로 하여금 흥복사(興福寺)에 빌었다. 아이들은 푸른 옷차림으로 석척을 부르며 경복궁 경회루 못가에서 빌게 하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게 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권4, 세종 1년 5월 29일).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달 12일에 기우제를 지낸 뒤로 비가 비록 내렸으나, 아직도 흡족하지 아니합니다 하니……또 석척기우와 취무기우를 행하되 모두 3일 동안 하고……비를 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권3, 단종 3년 5월 19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근일 가뭄이 극심해서 비를 바란 지가 오래인데 비가 올 듯하면서 오지 아니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기도하는 일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금년에는 무(巫)·맹(盲) 및 소동(小童)의 기우를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또한, 전례를 상고해서 아울러 거행할 것으로 예조에 이르라”(『명종실록』 권23, 명종 12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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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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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석척 기우제는 무당이 담당한 무속 기우제의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무속 기우제는 당연하게도 조선시대에 행해진 유일한 유형의 기우제가 아니다. 조선시대 기우제에는 승려와 어린아이도 참여하였 으며 도교식 의례도 행해졌고 관원이 진행하는 유교식 의례도 정착되었다. 기우대상도 산천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곳 외에 종묘·사직·우사단·풍운뇌우단·북교·소격전 등을 대상으로 기우제가 행해졌다.

국가의례에 대한 유교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무속 기우제 중단에 대한 논의가 성종 때부터 시작된다. 이어 많은 논의를 거쳐 숙종 때에 12제차의 국행 기우제의 과정이 확립된다. 그러면서 무속 기우제는 국행 기우제에서 배제되어 인조 25년(1647)에 종결된다. 곧, 영조 21년(1745)에는 봉상시가 주관한 제사 관련 기록인 태상제안(太常祭案)에서 명칭 자체가 삭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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