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4. 조선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2. 기양의례
  • 다. 통과의례
이용범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 행하는 의례가 통과의례이다. 이러한 통과의례 중에는 무속의례도 있는데, 조선시대 무속에는 죽음 관련 의례가 많았다. 무속의 죽음의례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조선시대부터이다. 죽은 자의 혼이 빌미가 되어 산 사람에게 병이 생길 수 있다는 관념이 적어도 고구려 때부터 확인된다는 점에서, 무속의 죽음의례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발생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이전부터 행해지다가 조선시대부터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시대 무속의 통과의례에는 죽음의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출산이나 결혼과 관련된 무속의례도 있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충청도 진천 풍속에 3월 3일에서 4월 8일까지 여인들이 무당을 거느리고 우담당(牛潭堂), 동서용왕당(東西龍王堂), 삼신당(三神堂)에서 기자(祈子)의례를 행했음이 확인된다. 이때 사람들이 많아 마치 시장거리 같았다고 한다. 또한, 『태교신기(胎敎新記)』에도 아 이를 임신한 집에서는 판수와 무녀에게 가서 부주기양(符呪祈禳)을 행하고, 불사(佛事)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아이를 임신하거나 임신한 아이를 위한 무속의례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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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1904년]
굿[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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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결혼을 앞두고 행하는 무속의례도 있었다. 예탐신사(豫探神祀), 즉 결혼여탐굿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를 보면, 손각씨를 모시는 집안에서는 딸을 출가시키기 전에 결혼여탐굿을 하였다고 한다. 궁중에서도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처녀가 삼간택(三揀擇)되어 별궁살이를 할 때 여탐굿을 벌였다. 이 굿은 국무당과 다섯 명의 무녀들이 주관했으며, 종친과 외척, 양반부녀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결혼을 앞두고 행해지는 여탐굿은 조상에게 결혼을 알리고 결혼 당사자의 제액(除厄)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한편, 결혼할 처녀는 결혼 전에 금성산 산신에게 먼저 시집을 가야한다 해서 금성당에 하룻밤 재우는 것도 무속의 결혼 관련 의례라 할 수 있다.

죽음 관련 무속의례에는 상장례 과정의 하나로서 행해지는 것과 사후에 조상을 모시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야제를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무당집에 위호(衛護)를 설치하여 조상을 모시는 것을 들 수 있다.

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상장례로 상을 치르면서 무속의례를 끌어들이는 것은 선초부터 지적되고 있다.

지금의 민간 풍속이 평상시에는 존비(尊卑)를 물론하고 다투어 음사(淫祀)를 숭상하고, 무당을 높이어 신뢰해서 재물과 곡식을 허비하고, 거상을 당하게 되면 혹은 무당의 집에 가 서 풍악을 베풀어 신을 먹인다(『세종실록』 권76, 세종 19년 2월 14일).

그래서 성종 9년(1478) 1월 27일에 “상인(喪人)이 무격에게 가서 음사를 행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상이 발생했을 때 무속의례를 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된 그해 12월 14일에 여전히 “어버이를 장사하는 날에 신을 즐겁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당을 불러 와서 술을 마시고 풍악을 베풀어 하루를 다하고 밤새도록 하지 않는 짓이 없”다는 것이 지적된다.

아마도 이는 현재에도 발인 전날에 행해지는 진도의 ‘다시래기’와 같은 상여놀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지방에서 밤을 세워 행해진다는 이른바 ‘영철야(靈撤夜)’는 이것의 좋은 예이다.

음사를 숭상하는 것은 성안에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외방이겠습니까? 이 폐단뿐만 아니라, 그 부모의 상장(喪葬)에 가재를 기울여 유밀과(油蜜果)를 많이 만들어서 놋동이에 높이 괴어 놓고, 손님을 모아 풍악을 벌여 시체를 즐기게[娛尸] 하면서, 이를 이름하여 ‘영철야’라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 풍습에 구애되어 기한이 지나도록 장사를 치르지 못하니, 이는 아름다운 풍속이 아닙니다. 청컨대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통절히 혁파하는 것이 합당합니다(『중종실록』 권4, 중종 4년 6월 4일).

발인 전에 시신을 즐겁게 하는 이러한 ‘오시(娛尸)’는 당시에 경상, 충청, 전라도에서 주로 나타났던 풍속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旬五志)』 상권에 무당을 데려다가 빈당(殯堂)에서 풍악을 벌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니 이를 청혼(聽魂)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역시 유교 상장례에 무속이 개입한 사례이다.

이와 아울러 조선시대 몇몇 문집에 나오는 다음 사례들 역시 유교 상장례에 (불교를 포함한) 무속의 죽음의례가 일상적으로 개입하였음을 반증한다.

초상 때부터 대상, 담제 이후까지 일체 무격과 불교의 행사를 하지 않도록 하라…

상제는 모두 예제를 따르고 무격과 같은 요사하고 음란한 무리는 집안에 발을 드리지 않도록 하다…

유서에서 말하길 상(喪)을 치룰 때 무격은 절대 금한다….

장례를 마친 후 탈상하기 전까지의 기간에도 여러 무속의례가 행해진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사후 7일마다 굿을 했음이 확인된다.

죽은 종의 이렛날이라고 돌금이가 무당을 불러다 제사하였다.

죽은 계집종 춘비의 사칠(四七)일이라며 그 남편 방실이가 위하여 굿을 하였다.

장례 이후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무속의례인 야제는 사후 100일 째에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전 직장 김여성(金礪成)은 괴산 사람이다……주이(注伊)는 청주 사람인데, 남편[김여성]이 죽고 얼마 안 있다가 시부모가 작고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매파(媒婆)를 놓아 간음하려 하자 주이는 백일 탈상(百日) (脫喪)한 후에 따르기로 약속하고 백일 날에 망부(亡夫)의 야제를 지낸 뒤 밤중에 방에 들어가 남몰래 목매어 죽었다(『중종실록』 권73 중종 27년 7월 6일).

이 사례는 야제가 탈상과 함께 행해지기도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 죽음을 위해 행해진 야제는 규모가 대단히 컸다. 많은 수의 남녀가 참여하였고, 제물을 성대히 차리고 음주가무로 진행되었으며 불교의례도 같이 행해졌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립니다.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 오고 불상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옵니다. 수령들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8월 2일).

근일에 한 상인이 성 밖에서 야제를 지냈는데, 남녀가 거의 수십 명에 이르렀고, 나이 어린 기생(娼兒)들도 참여하여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이미 잡아다가 논결(論決)하였습니다(『세조실록』 권4, 세조 2년 5월 7일).

이처럼 죽음이 발생했을 때 유교식 상장례와 함께 무속의 죽음의례가 함께 진행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진오기굿, 씻김굿, 시왕맞이 등의 무속의례가 그 예이다. 오늘날 행해지는 무속의 죽음의례에는 불교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무속의례와 불교의례가 병행되는 조선의 야제로부터 그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행해진 야제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형식의 하나는 무당 의 신내림을 통해 죽은 자의 말을 듣는 것이다. 명종(明宗) 때 사은사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죽은 임백령(林百齡)의 생전의 말이 그가 죽은 뒤 행해진 야제에서 무당을 통해 확인된다.

이때에 이르러 도중에 병을 얻어 죽게 되자, 애써 일어나 애걸하는 모양을 지으면서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뒤에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하여 야제를 지낼 때 무당의 말도 그와 같았으므로 듣는 이들이 자못 화제로 삼았다(『명종실록』 권4, 명종 1년 7월 19일).

여기서 무당이 말하는 바란 임백령의 혼이 무당에게 실려서 한 말일 것이다. 죽은 자의 말이 아닌 단순한 무당의 말이라면 그 말이 화제거리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는 호랑이가 물어온 여자를 살린 충청도 어느 절의 승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를 구해서 보살핀 뒤, 그 승려는 그 여자를 데리고 그 여자가 살던 집으로 간다. 여자의 집은 전라도였다. 여자의 집에 가본 즉 호랑이에 잡혀 간 여자를 위한 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이 이 여자를 데리고 그 마을을 찾아가서 여지는 동구(洞口)에 두고, 거짓으로 탁발하러 다니는 행색을 하고서 먼저 그 집을 방문하니, 여자 집에서는 무당을 맞이하여 죽은 혼을 부르고 있었다. 무당이 죽은 귀신이 범에게 잡아 먹힐 때의 고통을 형용하니 부모 친척들이 발을 구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때 딸이 천천히 집에 들어가니 부모가 보고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야 알아보고는 서로 안고 통곡하였다. 그리고 그 중을 후하게 사례하여 돌려 보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위한 굿에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죽음의 상황 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속 죽음의례의 한 과정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숙권 역시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자신의 증조부인 어효첨(魚孝瞻)이 무당에게 실려 하는 말을 전하고 있다.

세속에 사람이 죽은 지 3일과 7일에는 으레 술과 떡을 가지고 무당집에 가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새 혼령이 내려와 지난일과 미래의 일을 말해 준다.”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종들이 한 무당집에 찾아 갔더니 무당의 말이, “나는 평생 이런 일을 좋아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빨리 돌아가라.” 하였다.

아울러 이 자료를 통해 죽음이 발생했을 경우 유교식 상장례와 함께 무속의 죽음의례가 병행되었음을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에 실린 어려서 죽은 아이의 생일에 지은 시를 보면, 역시 무당을 불러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다음 구절 또한, 무당이 무속의 죽음의례에서 죽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 사회적 관행으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해 준다.

춘관(春官)에 “사무(司巫)가 상사(喪事) 때에 무강(巫降)의 예를 맡았다.” 하였고, 주에는 ‘강(降)은 내린다[下]는 뜻이며, 무당[巫]이 신을 내리게 하는 예는 지금 세상에서 사람이 죽어 염한 뒤에 무당을 불러 길귀신[禓]을 내리게 하는 것이 그 유례(遺禮)이다.’ 하였는데, 이는 성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건대, 시골 무당이 노래와 춤으로 망혼(亡魂)을 불러 망혼의 말을 흉내내면서 어리석은 세속인을 유혹하여 재물을 사취하니, 마땅히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없애야 할 것인데, 어찌 도리어 경전에 보였단 말인가?

위호(衛護)란 간단히 말해 돌아가신 조상의 혼을 무당집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조상의 혼을 유교의 신주 형식이 아닌 지전(紙錢)이나 조상의 형상을 그린 그림 형태로 모신다. 그리고 이를 대상으로 조상의례를 행한다. 이때 한 집의 가장이 부인과 딸 등 온 가족을 데리고 무당집으로 데리고 가서 조상의례를 행한다. 또한, 신(神)노비 또는 위호노비(衛護奴婢)라 하여 무당집에 여러 명의 노비를 주어 부리도록 하기도 한다. 물론 무당집에 위호를 설치하지 않았는데도, 무당집에 가서 조상의례를 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유교사회인 조선사회에서 조상숭배의 통로 가운데 하나로서 역할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당집에 위호를 설치하여 조상의 혼을 맡기고 신노비를 주는 행위에는 조상이 빌미가 되어 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관념이 깔려있다. 다음의 두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사대부의 집에서 조상의 신을 무당의 집에 맡기고 신을 호위한다는 이름으로 혹 노비를 주되 4, 5명에 이른다고 하오며, 만약 주지 않으면 부모의 신이 자손에게 병을 준다고 하오니, 유명(幽明)은 다르다 하더라도 이치는 한 가지일 것이온데 어찌 부모의 신이 자손을 병들게 하겠사옵니까. 의리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오니 사헌부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옵소서”(『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7월 13일).

또 사대부 집에서 이따금 조상의 신(神)을 호위한다고 일컫고 무당의 집으로 신을 맞이하여 가고 노비를 주어 부리게 합니다. 온 집이 친히 가서 아첨과 모독(冒瀆)으로 제사하고, 조금만 병이 있으면 조상의 빌미라 하여 곧 기도를 하니, 실로 조금도 조상을 높이고 공경하는 뜻이 없사옵니다(『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7월 17일).

이런 점에서 위호로 상징되는 무속적 조상숭배 방식은 조상숭배 의례의 한 형식이지만, 조상은 항상 자손을 돌볼 것이라는 유교적 관념과 다른 조상관념을 전제한다. 한편, 나라에서는 이렇게 위호를 실행하는 집안의 가장에 대해서는 불효자로 규정하여 과거에 영구히 채용치 않고 위호노비는 속공하여 관아에서 몰수하는 정책을 펼쳤다. 현재에도 조상의 의복과 돈을 넣은 말명상자를 굿당이나 무당집에 맡기는 관행이 있다. 여기서 말명상자란 바로 위호의 한 형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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