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4. 조선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형식
이용범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분명치 않던 죽음의례 등 무속의 통과의례가 확인되고, 천연두 치료를 위한 마마배송굿이 새로 나타나는 등 점복·기양의례·기복의례로 유형화되는 다양한 의례가 행해졌다. 또한, 무속의례들은 가정, 지역사회, 왕실과 국가 등 조선시대 모든 삶의 주체를 단위로 실천되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 무속의례는 국가와 관련된 공적인 영역을 제외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존재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공적인 영역을 제외하고 삶의 주체의 삶 전반과 연결되는 무속 의례체계가 형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 무속의례들은 그것이 행해지는 시간에 따라 정기의례와 임시의례로 나뉜다. 점복이나 기양의례의 범주에 드는 치병, 죽 음, 기우를 위한 의례들은 삶의 필요에 따라서 행해지거나 문제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행해지는 임시의례이다. 임시의례의 경우 의례가 행해지는 시간이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특정된 의례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은처럼 기복의례의 범주에 들어가는 정기의례이다. 왕실이나 국가에서 행한 기은의 경우 봄과 가을에 행해지거나 춘하추동 사계절에 행해졌다. 민간기은의 경우에도 봄, 가을에 걸쳐 행해졌다. 역시 넓은 의미의 기은에 포괄할 수 있는 마을굿과 고을굿도 의례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5월 5일 단오가 두드러진다.

무속의례가 행해진 의례공간 역시 매우 다양하다. 명산대천, 신사(神祠), 성황사는 물론이고 거주지 주변의 산과 들에서도 행해졌으며, 일반 사람의 가정집과 무당의 집에서도 행해졌다. 특히, 무당의 집은 일반 사람의 조상을 모시는 위호가 설치되고 조상의례가 행해졌으며, 병이 발생할 경우 피병의 공간으로도 기능하였다. 이런 점에서 무당의 집은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갖는 공간이었다.

오늘날 굿과 같은 무속의례 절차가 확립된 것도 조선시대이다. 19세기 자료로 보이는 「무당내력(巫黨來歷)」과 「무당성주기도도(巫黨城主祈禱圖)」의 두 그림 자료는 오늘날 서울지방의 굿과 순서만 다를 뿐인 굿 절차를 그림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해 준다. 따라서 적어도 19세기 이전에는 오늘날 굿과 같은 절차의 무속의례가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자료보다 조금 앞서서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굿이 성립되어 있음을 확인해 주는 자료가 신윤복(申潤福)의 「무녀신무(巫女神舞)」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무당내력」과 「무당성주기도도」처럼 굿 절차 하나하나를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굿을 진행하는 무당, 굿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남자 악사, 굿을 의뢰한 여성들, 소략하지만 굿상 등 오늘날 굿의 구성요소가 다 나 타난다. 더욱이 머리에 갓을 쓰고 홍천륙을 걸친 채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무당의 모습은, 오늘날 서울 무속에서 무당이 굿을 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무속의례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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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성주기도도
무당성주기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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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신무
무녀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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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는 시조도 있다. 이 시조는 한국 무속 죽음의례의 하나인 서울 새남굿의 존재를 확인해 준다. 영조 4년(1728) 김천택(金天澤)이 편찬한 가집(歌集) 『청구영언(靑丘永言)』 「만횡청류(蔓橫淸流)」 항목에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새남굿을 그린 시조가 실려 있다.

靑개고리 腹疾야 주근 날 밤의

金두텁 花郞이 즌호고 새남 갈싀

靑묍독 겨대 杖鼓 던더러쿵 듸

黑묍독 典樂이 져 힐니리 한다

어듸셔 돌진 가재 舞鼓를 둥둥 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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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광경
굿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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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즌호고 새남’은 ‘진오기 새남’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화랑’은 남자무당을 의미한다. ‘겨대’는 ‘기대’이다. 기대는 이전에 서울굿에서 장구를 전담하고, 긴 내용의 바리공주나 성주풀이 무가(巫歌), 부정 등을 담당하였다. 이 시조 역시 청메뚜기가 기대로서 장구를 맡는다고 말한다. ‘전악’은 ‘전악(典樂)’으로 보인다. 전악은 서울굿에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구성하는 악기 중 주로 피리·해금·대금 등을 연주하는 남자 악사이다. 요즘 서울 굿판에서는 여전히 남자 악사를 전악이라 부른다. 이 시조에서 전악인 흑메뚜기는 피리를 담당하고 있다. 한편, 가재는 북을 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조에 나타난 진오기·기대·전악 등의 용어는 서울지역 무속에서 나타나는 용어이다. 그리고 이 시조는 밤에 진오기 새남굿을 하러 간다고 했는데, 이는 서울 새남굿의 전반부인 안당사경맞이가 밤에 시작되는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시조는 적어도 18세기 초반에는 서울지역에 무당과 기대, 악사 등이 주체가 되어 삼현육각의 음악으로 진행되는 새남굿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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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의 제물
굿의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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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지방에서 행해지는 새남굿은 무속의례를 중심으로 거기에 불교, 유교의례의 절차가 결합된 형태로 진행된다. 무속의례의 절차에 불교의례가 결합하는 것은 조선 초기에 행해진 야제를 통해서도 이미 확인되었다. 그런데 무속의례에 불교 외에 유교의례 절차가 포함된 새남굿이 18세기 초반의 자료로 확인된다는 것은 이미 이 시기에 무속의례와 유교의례의 결합도 이뤄졌음을 나타낸다. 이는 오늘날 마을굿이나 지역단위의 고을굿에서 유교제례와 무속의 굿을 병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조선시대의 무속의례는 제물을 차려놓고 음악을 반주하면서 무당이 춤과 노래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은이나 야제의 경우 제물을 성대히 차리며, 음악도 남자 악사 홀로 전담하지 않았다. 남자 악사 4, 5인이 악기를 담당하고, 이외에 여악(女樂)을 담당한 내녀(內女)와 노래 부르는 자 5, 6인이 더 참가했다. 그리고 광대가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은과 야제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악기는 갈고(羯鼓)라는 장구와, 북과 피리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선시대 큰 굿에서는 삼현육각을 잡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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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들
명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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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속의례의 핵심적인 절차는 무당의 신내림을 바탕으로 한 신과 인간, 그리고 조상과 같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자료를 보면, 신내림은 현재 무속학계에서 설정한 이른바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을 막론하고 다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미 『고려사』에 전남 나주의 금성산 신의 말을 전하는 무당이나 금성산 신이 내려서 된 무당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리고 천제석이 강신하여 요망한 말을 전한다해서 요무로 처벌받는 무당들 대부분이 현재 세습무권으로 설명되는 한강 이남 지역에서 나타난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행해진 죽은 자를 위한 굿에서 죽은 자가 강신하여 죽음 당시의 상황을 무당을 통해 전한다든지, 『천예록(天倪錄)』에도 송상인(宋象仁)이 전라도 남원에서 죽은 친구의 혼이 무당에게 내려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처럼 무당의 신내림을 바탕으로 한 신과 인간,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인 만남과 대화는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현재 한국의 무당들은 명도라 하여 둥근 청동 거울을 자기 신당이나 굿당에 건다. 또한, 쌀로 점을 친다든지, 굿에서 작두를 탄다든지, 무거운 놋동이를 입으로 문다든지, 아니면 죽은 자를 위한 굿에서는 쌀이나 재위에 남은 흔적을 보고 죽은 자의 환생여부를 점친다. 그런데 이러한 굿행위 양식은 『조선왕조실록』·『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성호사설』 등의 조선시대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현재 한국 무속의 굿에 나타는 중요한 의례행위 역시 이미 조선시대에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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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그릇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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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날 행해지는 한국 무속 의례의 틀이 확실하게 확립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거의 동일한 유형의 무속의례가 성립되었고, 오늘날 굿과 같은 형식으로 굿이 진행된 것이 바로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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