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1. 무당, 신과 인간을 잇는 중개자
  • 역사 속 무당의 위상 변화
  • 고대 무당의 존재와 역할
이경엽

무당은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놓이는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속에서 중요시하는 제의용 도구인 청동 방울이나 청동 거울 등이 청동기시대 유물로 나오는 것을 통해 그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굿을 할 때 세우는 신간이나 솟대, 당산나무의 원형적인 모습을 단군신화의 신단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조선시대에 이미 무속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는 잘 알려진 대로 제정일치 사회이므로 무당의 지위가 높았다. 의례용 도구가 무기류와 함께 당시 지배층의 분묘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별개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의 단군을 통해 당시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단군왕검은 정치적 지도자이면서 사제이기도 했다. 단군은 하늘을 뜻하는 알타이어 ‘텡그리’(Tengri)의 음을 딴 것이고 왕검의 검은 신령을 뜻하는 ‘캄’(kam)의 음역을 따서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이란 말 자체가 신인(神人) 또는 무군(巫君)의 뜻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정일치시대에는 정치적 지배자는 무왕(巫王, Shaman-king)으로서 정치적 역할과 더불어 사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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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방울
청동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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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초까지도 무당의 지위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제2대 왕 남해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당시 존경받는 무당이란 뜻이라고 적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귀신을 위하고 제사를 숭상하는 무당을 경외하여 존장자의 의미인 자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해왕 3년에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의 누이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제정이 분리되고 여자 무당이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당이 여자라는 점에 비추어 여무의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최초의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삼국시대에 무당들은 질병 치료, 점복과 예언, 각종 의례 집행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개인적·사회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일도 수행했다. 국가의 앞날을 예언한다든가, 기후와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재난의 예방 및 퇴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국가 및 사회를 유지하고 번영시키기 위한 종교적인 방도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무당이 국정을 보좌하고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불교가 유입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속의 기능이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한 동안 무속과 불교는 갈등을 빚기도 했다. 물론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공존의 길을 모색했으며, 이후로도 무·불습합의 양상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무속은 새로운 사회 변화를 주도하거나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을 제공하지 못한 까닭에, 불교의 확산에 반비례해서 사회적인 역할도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무당의 정치적 역할이 축소되어 국가의 공적 조직에서 배제되었고 국정을 보좌하는 공식적인 기능 역시 크게 약화되었다. 이어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무속을 배척하는 주장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곧, 무당의 궁중 출입 금지, 도성 밖으로의 축출, 무당이 담당하던 기우제나 별기은(別祈恩)과 같은 국행(國行) 의례를 중지하 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일부가 실행되기도 했다. 당시 무속을 배척하는 조치들의 실효성은 크지 않았으나, 무당들의 활동에 제약이 되었고 무업을 천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고려시대에 무당들은 일부 제약 조건이 있긴 했으나 국가나 사회적 차원의 의례를 여전히 주재했으며 민중들에게 제공하는 종교적 기능을 지속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당시 무당의 활동상을 세세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오늘날과 비슷한 의례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규보(1168∼1241)의 <노무편>이란 시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본래 이 시는 이규보가 자신의 집 근처에 살던 노무녀(老巫女)가 축출령에 따라 개경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지은 시인데, 그의 의도와 상관 없이 12세기 무당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무당들은 신당에 제석신, 칠성신 등의 그림을 모셔놓고 신의 말을 전하고 춤을 추면서 굿을 했고 신도들이 운집해서 그 굿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격이나 신당의 모습, 굿의 절차나 내용 등이 현존하는 굿의 골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과 같은 무속의 모습이 이미 고려시대에 형성되었고 무당의 역할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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