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1. 무당, 신과 인간을 잇는 중개자
  • 역사 속 무당의 위상 변화
  • 무속 탄압과 무당의 역할 축소
이경엽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무속은 성행했다. 서민층은 물론이고 궁중이나 귀족들이 무당에게 각종 의례를 의탁하는 전통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국행 의례를 무당이 주관하는 전통 역시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지배 권력이 국가 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면서 노골적으로 무속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무속을 음사로 규정하고 여러 가지 제 도와 장치를 통해 탄압했던 것이다. 도성 내에서 무당의 거주와 출입 및 무업 행위를 금하고, 무당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무당을 배치해서 국가에 봉사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 중에서 특히 무세(巫稅)는 제도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직접 압박하는 배척 수단이었다.

지금은 무당들에게 특정의 세금을 따로 부과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무세가 있었다. 무당들에게 세금을 징수한 것은 고려 후기부터 확인되지만, 정식 세금으로 제도화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무세를 징수하는 목적은 무속을 탄압하고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금이라는 형식으로 경제적 부담을 주어 무당이 무업을 포기하고 민중들을 무속에서 멀어지게 하고, 전방위적으로 무속을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세 징수는 성호 이익(1681∼1763)이 『성호사설』에서 그 실상을 지적했듯이 모순된 결과를 빚었다.

민간 풍속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는데 이를 신사(神事)라 하고 법으로 이를 능히 금하지 못하고 있다. 금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권장하는 까닭이 있다. 무릇 무녀들은 모두 세금을 내고, 관에서는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는 모두 기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 무당을 마땅히 배척하고 근절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세금을 거둔다 말인가. 이미 세금을 거두면서 또 그 귀신 섬기는 것을 처벌하여 많은 속전(贖錢)을 받아 관에서 이득을 보니, 이는 관에서 금하는 것이 아니오. 그 본의는 돈과 베를 거두어 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

무속을 근절한다는 명목으로 무세를 징수했지만 그 돈의 출처가 ‘귀신 섬기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세금을 관의 운영비로 사 용하게 되니, 결국 무당을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문제가 있어 근절하겠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공식화하는 모순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무세 부담자의 대부분이 무녀 곧 여성인데, 여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 자체가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무세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머지않아 무세 징수가 재개되었다. 또한, 지방관의 재량권이 허용되는 세금이었기 때문에 쉽게 폐지될 수 없었고 오히려 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무세는 무당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무세를 피해 무격들이 도망을 가고 무호(巫戶)가 흩어지는 현상이 잦았다. 이것은 세금을 통해 무업을 근절시키겠다는 무세 징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였다. 이런 상황이 되자 무속 집단에서는 신청(神廳)을 통해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세를 둘러싸고 공동체를 조직하고 폐단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무업이 순수한 종교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경제적인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무속 탄압 정책이 지속되면서 무당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 국가적 차원의 의례를 주재하던 전통은 사라졌고, 성황제를 비롯한 축제 형식의 고을굿이 음사로 규정되고 중단되었다. 곧, 국가나 제도적 차원의 무당의 역할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탄압이 지속되면서 무당을 하대하는 풍조가 고착화되어 무당의 지위가 약화되고 역할이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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