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2. 무당의 생활사
  • 무당의 신분
  • 무당은 천민이었는가?
이경엽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의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완벽한 사회는 아니지만 차별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특히, 종교의 차이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어떤 직업군을 대상으로 신분을 들먹이는 것은 과거적인 행위일 뿐 일상 언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가수나 배우는 창우광대라고 해서 대표적인 천인으로 여겼으나 지금은 스타로 대접받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래와 춤, 재담 등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소위 연예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끝 없이 주 목받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간다. 과거에는 존중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지금은 전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봉건시대 신분제의 관념으로 귀천을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지만 제도가 사라지고,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데도 신분 문제가 관념으로 남아 속박이 되기도 한다. 특히, 무당을 대할 때에 하대하는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과거에 천인으로 거론되던 노비·백정·광대·창기 등에 대한 관념은 이미 사라졌는데 무당에 대해서는 왜 그 관념이 지속되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는 외래 종교에서 미신시하는 시선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지만, 무당이 곧 천민이라고 여겨온 신분 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봉건시대 무당의 신분은 어땠을까. 무당의 몸에 유전자와 같은 낙인을 갖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무당의 신분이 천인으로 고정돼 있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있으므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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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 박진명 일가의 신분과 직역
무부 박진명 일가의 신분과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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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도표는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경상도 단성현(지금의 산청군 일대)에서 살았던 무부(巫夫) 박진명 일가의 가계도이다. 가계도에서 보듯이 무당 집안에서 무부도 나오고 노비도 나오고 관아의 취타수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진명은 양인의 신분인데 화랑, 곧 무부이고, 그의 후손들은 노비와 양인이 다 있고, 그 직역도 사노비·무당·취타수 등으로 한결 같지 않다. 시대에 따라 신분에 변화가 있고 무당직이 신분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단성호적을 분석한 임학성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초기에는 사노비의 신분이었다가 후대에 양인으로 바뀌게 되고, 그 신분과 관계 없이 무업을 했다고 한다. 신분 변화는 양녀(良女)와 혼인하는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신분제는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종모법(從母法)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양녀와 혼인하게 되면 자식들은 노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다. 위의 가계도를 보면 노비가 양녀와 혼인하는 사례가 많고 그에 따라 신분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17세기 말엽에는 무당의 신분이 양인(良人)과 노비가 대체로 절반씩 차지하고 있었으나 18세기 전반 이후로는 거의 양인 신분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조선 후기가 되면 무당은 주로 양인 신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기존에 우리가 막연하게 짐작하던 사실과 너무 큰 차이가 있지만, 조선시대 무당은 천인 신분이 아니었고 양인 신분이 무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런 실증적인 연구 결과에서 보듯이 무당의 신분을 무조건 천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16,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후 사회가 급변하면서 신분제가 요동치고 양천교혼(양인과 천인의 혼인)에 의해 신분 변동이 일어났다. 17세기까지 30% 내외이던 양천교혼이 18세기에는 60%로 급증했다고 하는데, 자연스럽게 천인의 숫자는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 정부에서도 조세 수입 과 병력 충원을 늘리기 위해 노비 숫자를 줄이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총체적으로 신분제에 변동이 일어난다. 1801년에 공노비 제도가 폐지되고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노비제도가 완전히 철폐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고정불변의 제도라고 보기 어렵다. 무당 역시 마찬가지로 천인 신분으로 고정되지 않았으므로 천인만이 아니라 양인 중에서도 무당이 계속 배출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천인보다 양인이 무업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무당이 곧 천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설명이다. 사실이 이런데도 왜 무당을 천하게 여기는 관념이 강고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양반 위주 신분제를 통해 우열을 가르는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고, 천인의 범주를 무의식적으로 고착화했던 고정 관념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교 중심의 지배 이념이 무속과 무당을 근절의 대상으로 낙인 찍어 배척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속을 비롯한 전래의 종교적 전통을 음사로 규정하고 무당을 근절시키고자 했던 정책과 맞물리면서 무당을 천인이라 하대하고 무시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서양의 외래 종교가 유입된 이후 퍼진 적대적인 태도도 거기에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분의 문제보다는 역할에 대한 차별 의식이 지속되면서 무당을 하대하는 관행이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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