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2. 무당의 생활사
  • 무당 집안 사람들의 직업
이경엽

신을 받아 무당이 된 사람은 집안 내림과 무관하게 무업을 한다. 하지만 그 당사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신무 집안에도 자세히 살펴보면 거듭 무당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두고 ‘부리’, 곧 무당 조상이 있어서 신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혈연적으로 무업을 승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세습에 의해 무당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신무의 집안에서 무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특이하다고 할 수 없다.

무계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당을 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무 당을 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안 할 수 있다. 실제 요즘 대부분의 무계 출신 젊은이들은 집안 내력과 별개의 삶을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무업을 기피하고 집안 내력과 단절하게 되면서 많은 지역에서 세습무의 대가 끊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회의 차가운 인식이 무계의 단절과 약화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계 출신들의 활동 범위는 전통적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집안 대대로 무업을 잇고 있는 세습무의 경우 사회화된 재생산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거듭 무당이 배출되었고, 무업과 관련된 특정 직업이 많았다. 가장 많은 것은 예술 계통에서의 활동이다. 기생 역시 같은 범주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농부나 어부로 사는 경우도 있으나 대장장이나 이발사로 사는 이들도 많았다. 둘 다 쇠를 다루는 직종이어서 연결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는 전문적으로 쇠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고대 샤만의 직능과 연결되므로 흥미롭다. 여러 지역에서 무계 출신의 대장장이에 대해 조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대로부터 이어진 전통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지금은 가게나 철물점에서 연장을 사지만, 과거에는 대장간[성냥간]에서 철물을 제작했다. 대장간은 풀무질을 해서 쇠를 달구고 그것을 두드려 호미나 낫을 만들고 고장난 농기구를 수리하는 곳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번 외출할 수 없으니까 일하다가 부러지거나 고장 난 농기구를 장날이면 들고 나와 성냥간에 맡겨 고치거나 새것으로 장만하곤 했다.

이 성냥간도 무계와 관련이 있었다. 대장장이를 무계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도에는 3대 이상 대장간을 하고 있는 집이 두 집이 남아 있었다. 임회면 십일시의 한씨와 조도면 육동리의 최씨는 당골 집안 출신으로서 세습으로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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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분 제4호 묘 야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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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야쿠트족 속담에 “대장장이와 샤먼은 한 둥우리에서 나왔다.”, “대장장이는 샤먼의 큰형님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최초의 대장장이와 최초의 샤먼과 최초의 도공은 형제들이다. 그 중에서 대장장이가 맏이고 샤먼은 둘째다.”라는 말도 있다. 불의 지배자이자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를 특별하게 존대하는 표현이 담겨 있다. 석기시대 이후 문화적 영웅으로 떠오른 대장장이의 위상을 말해준다. 그리고 아프리카 농작 지대에서는 대장장이가 토지 경작에 필수적인 농기를 갖다준 문화 영웅으로 존경받았다고 한다. 철기가 도입되면서 금속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외경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던 정황을 짐작케 해준다.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는 대장장이의 후예로 호공(瓠公)의 집을 차지하기 위해 호공의 집터에 숫돌과 숯을 묻고, 그곳에서 조상들이 대대로 대장장이를 했던 증거라고 내세워 집을 차지했다고 한다. 대장장이의 지위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때만 해도 불과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의 존재가 외경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해의 여러 행적은 무당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한데, 그것이 대장장이와도 연결되므로 흥미롭다.

대장간은 무당들의 활동 구역인 당골판과 비슷했다. 대장간은 당골판과 비슷한 방식으로 매매되었다. 매매 시에는 호당 가격을 치고 연장과 함께 거래되었다. 그 방식이 당골판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또한, 대장간에서 관장하는 마을은 일정하게 구획되어 있었다. 관할 구역에 속하는 주민들은 연장을 가져갈 때 현금을 주지 않고 봄·가을에 한꺼번에 곡식으로 가격을 치렀다. 이것을 ‘쏙수’ 또는 ‘원당’이라고 했다. 여름 곡식은 보리로 하고, 가을 곡식은 나락으로 하는데, 농가 규모에 따라서 그 양에 차등이 있었다. 이것은 당골판의 ‘양동’과 비슷했다.

대장간과 당골판에서 봄 가을에 곡식으로 삯을 받는 방식은 이발소나 나룻배 사공에게도 적용되었다. 이것은 현금 결제가 일반화되지 않은 시장 환경과 관련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착 생활을 하는 농경 사회의 유습인 것 같다. 특히, 당골판과 성냥간의 긴밀한 관계는 사회민속학적으로 흥미로운 주제여서 더욱 관심을 끈다. 무당 집안에서 담당하던 직업이므로 그 유사성이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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