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4. 무당의 사회·경제적 활동 기반
이경엽

전통적으로 무당은 일정 구역에서 또는 일정 사람들과 무업을 매개로 특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다. 호남이나 충청 등지에서는 그 무당을 당골[단골]이라고 하고, 서울 등지에서는 무당·신도를 각각 만신·단골이라고 하며, 제주도에서는 무당[심방]과 연결된 지연·생업 공동체를 단골이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말의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지만 무당과 공동체 또는 신도들 사이에 맺어진 특정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당골판[단골판] 또는 당주권 등이 그것이다. 무당과 신도는 어떤 의례를 위해 일시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평소에 교류해 온 배경이 있어서, 절기에 맞춰 또는 수시로 의례를 요구하고 또 제공할 수 있었다. 당골판과 당주권은 무당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인정하는 무당의 경제적 이권과 관련된 관행이다.

당골판은 특정 무당이 일정 마을과 그 주민들의 의례를 전담하기로 약속돼 있는 사회·경제적 규약이다. 과거에는 세습무권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양상은 호남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30여 년 전까지도 유지되었 다. 진도군 지산면에서 활동하던 채둔굴의 경우 2000년대 초반까지도 당골판을 관리했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당골판의 기능이 사라졌다. 당골판은 교구와 같이 일정하게 구획되어 있는 종교적 관할 구역인데 마을이나 성씨 단위로 구성된다. 규모는 대개 5∼6개 마을에서 10여 개 이상 다양했으며, 호수도 보통 300호에서 500호 내외까지 다양했다.

진도 거제리에 살던 채둔굴 무녀가 남긴 ‘당골기’라는 기록에 의하면, 1950년 당시 16개 지역 333호를 관할했다. 당시 1호당 쌀 1말 가격을 지불하고 판을 샀다고 한다. 세습무는 당골판이 없을 경우 활동하는 데 제약이 많았으므로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거나 구입하고 임대하는 방법으로 당골판을 확보했다. 당골판은 생계의 기본 조건이므로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노무들을 만나 당골판에 대해 물으면, 밤잠 안 자고 일을 해서 판을 마련하고 논밭을 샀다는 얘기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굿을 하고 눈칫밥 먹으며 판을 사모았다는 얘기를 해주곤 한다. 곧, 당골판이 무업 활동의 기본적인 토대였음을 말해 준다.

당골은 자기가 맡고 있는 당골판의 주민들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았다. 전북 군산시 선유도의 사례를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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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의 세습무계(▲●-무업활동)
선유도의 세습무계(▲●-무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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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도표에서 정씨와 그의 딸 최고막니는 ‘당오매’ 역할을 하던 무녀다. 당오매(당어매)는 선유도의 유서깊은 마을 제당인 오룡묘(五龍廟)를 관리하는 당골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오매는 당을 지키고, 매년 열리는 산제와 3년마다 열리는 별신제 전반을 주관했다. 선유도 별신제는 인근 관리도·신시도·장자도·무녀도 등 고군산 12도 사람들이 구경을 올 만큼 성대했다고 한다. 무녀 2∼3명 이외에 외지에서 피리, 젓대 등을 부는 악사들과 줄타는 광대와 소리꾼을 불러와 크게 놀았다고 한다.

당골은 정기적인 공동체 의례 이외에 상시적으로 주민들을 상대했다. 주민들은 수시로 당오매를 찾아 상담을 하기도 하고, 철따라 점복과 고사 등의 각종 의례를 의뢰했다. 아이가 아프면 당오매에게 물어 보고, 출어하기 전에 당오매를 통해 고사를 지내고, 배가 제때 못 들어오는 일이 있을 때에도 점을 쳐보고 행방을 물었다. 이에 대한 댓가로 당오매는 봄과 가을에 주민들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았다. 일년에 두 번, 봄에는 보리를 받고, 가을에는 육젓을 잡아 육지에서 바꿔온 쌀을 받았다. 또한, 가을에는 주민들이 육지에서 짚을 사서 배에 싣고 와 마람을 엮어 당오매가 사는 초가지붕을 새로 이어주었다.

당골은 개별적으로 신도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전속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마을 전속 당골을 일러 ‘마을 당골 무당’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조선 무속의 연구』를 보면 해남 옥천면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전남 해남군 옥천면의 경우, 무(巫)가 개별적으로 단골집을 정한다기보다 마을민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를 필요가 있을 때 단골무당을 두는 풍습이 있는 곳이었다. 무는 자기 소속 마을 이외에서는 무사를 행하지 못한다.……그 생활비는 당연히 단골집이 공동으로 지급하고 봄가을에 농산물 을 준다. 그 외에 무가(巫家)의 개축·수선의 경우도 단골집 공동 부담으로 하므로, 이러한 경우 마을에서는 그 단골무당은 집집의 단골무당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단골무당이라야만 한다.

마을 일을 관장하는 전속 당골을 두고 마을에서 그를 경제적으로 부양했다는 내용이다. 집집마다 개인적인 의례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의례를 주관하는 마을 전속 성직자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무당이 공동체적 기반을 토대로 해서 활동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선유도와 해남의 사례처럼 호남지역 무당들은 마을굿을 관장하고 또 주민들의 개별적인 의례를 전문적으로 수행해 주고, 대신 주민들로부터 경제적 부양을 받았다. 이를 ‘양동’ 또는 ‘받거지’, ‘도부’라고 불렀다. 여름이면 보리, 가을이면 나락을 받았고 때때로 나오는 곡물을 받기도 했다. 당골은 당골판의 집집을 방문하여 양동을 하고, 고마운 뜻에서 떡이나 성냥 등을 조금씩 돌리기도 했다. 각 가정 단위로 주는 전곡은 어떤 강제성을 띠는 것도 아니며, 그 양이 따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당골판에서는 주민들의 경제적 부양과 당골의 종교적 의례 제공이라는 상보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당골판이 있어서 무당들은 안정적인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주민들은 마을 제당을 맡기고 또 수시로 필요한 의례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당골판은 특정 무당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무권(巫權)이자 사회적 내규였다. 이 권리는 철저하게 지켜졌는데, 만약 규율을 어기는 이가 있다면 당골 집단으로부터 호된 벌칙을 받았다. 또한, 이권과 관련되어 매매나 임대가 가능했다. 당골이 이사를 가거나 연로하여 굿을 못하게 될 경우에는 다른 당골에게 판을 매매하거나 임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골판은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으므로 생계와 관련된 권리 로 재산화해서 운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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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무녀
동해안 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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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골판과 비슷한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제주도에서는 마을 본향당을 관리하는 무당을 당맨심방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단골’은 본래 지연 공동체이며 더러는 혈연 공동체에서 비롯되었고 대개는 생업 공동체이기도 하다. 이들은 그들이 바라는 바를 기원하기 위하여 신당을 마련하고 매인심방의 생계를 지원하며 정기적으로 당굿을 해왔다. 지금은 당굿이 이루어지는 마을에나 단골판이 남아 있고, 과거와 달리 당굿을 맡은 심방이 단골판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본래 심방은 신앙권을 토대로 안정적인 무업 활동을 해왔다.

이것은 동해안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동해안에서는 마을굿을 담당하는 무당을 당주(堂主)라고 하며 그 무당이 가진 권리를 당주권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마을에는 마을마다 무당(당골, 단골무당)이 있는 것이 이상적이며, 마을에서 행하는 마을굿은 당연히 그 마을 당주가 담당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의례 능력이 부족할 경우 다른 마을 당주에게 의뢰하기도 했는데, 그 경우 마을 당주를 통해 소개를 받았으며, 일정한 역할을 맡게 하는 등 당주무를 무시하지 않았다.

동해안의 무당들은 당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 주민과의 친밀도를 유지하고 각종 기부와 부조를 하고 통혼을 통해 무계를 확대하는 등 치열하게 경쟁을 해왔다. 동해안의 당주무당이 지닌 당주권 역시 안정적인 무업 활동을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기반은 강신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신무라고 해서 개인적인 영적 카리스마만으로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공동체성을 담보하고 있다. 강신무가 되기 위한 내림굿은 개인의 관심사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신내린 사람은 내림굿을 하기 전에 마을과 인접 지역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쌀과 쇠를 걸립하여 그것을 가지고 굿 음식을 장만하고 무구도 만들어 내림굿을 받았다. 이처럼 걸립과 내림굿을 통해 만신과 신도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더불어 만신끼리의 대물림 관계도 형성되었다. 또한, 이외의 경로를 통해 만신과 신도의 관계는 더욱 구체화되고 확대되는데, 단골은 집안의 미세한 일에서 큰 일까지 대소사를 만신에게 상의하고 결정한다. 만신의 역할에 대해 단골은 수시로 만신에게 경제적 사례를 하고 정기적으로 치성을 드린다. 이와 같이 ‘특정 만신과 신도 관계를 갖는 단골’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서울굿의 지속성을 보장한 경제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지역 역시 호남의 ‘당어매’나 동해안의 ‘당주무’, 제주도의 ‘당맨심방’처럼 마을 제당을 관리하고 마을굿을 주관하는 당주무당이 있고 혈통 세습이나 사승 관계를 통해 계보를 이어왔다. 서울지역에서는 당주무당의 계보가 주민들로부터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받는 주요 조건이 될 정도로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만신과 마을굿에 참여하는 단골들은 2∼3대에 걸쳐 단골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긴밀한 관계가 있어서 서울에서 마을굿이 더 왕성하게 전승된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무당 사회에서 오랜 동안 유지돼온 당골제도에 힘입어 무당들은 안정적인 무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지역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무속 집단의 관행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안정적인 경제적 배경이 지속적으로 작용했으므로 생활과 밀착된 의례들이 더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 당골판 또는 당주권 등은 무당굿이 주민들의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전승될 수 있게 했던 가장 중요한 토대이고, 의례의 수요와 공급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또 의례의 진정성을 유지하게 한 조건이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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