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5. 무당의 대외 활동과 전통 예술
  • 무속 집단과 관속 음악인
이경엽

관속 음악인이란 말 그대로 관청에 소속된 예인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공립 국악원 소속의 음악가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물론 여러 가지 점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공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당대 최고의 전문 예인이라는 점에서는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속 음악인들은 그 신분이나 활동상에서 무속 집단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그것에 기초해서 양자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활동했다.

조선시대에 전문적으로 음악을 담당하던 부류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는 중앙의 장악원이나 군영에 소속된 음악인이고, 두번째는 지방 관아에 소속된 음악인이고, 세번째는 무속 집단과 기능적 예인 집단이다. 이 중에서 기능적 예인 집단은 남사당패·사당패처럼 유랑하는 속성이 있어 관속 음악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렇지만 무속 집단은 관속 음악인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첫번째 경우를 보기로 한다. 장악원의 악공·악생은 지방에서 번상(番上)해서 충원했다. 번상이란 지방 관원이 정기적으로 중앙이나 상급 기관에 올라가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규정은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이어졌다. 각 고을의 관찬 읍지에는 장악원 소속의 악생·악공과 악생보·악공보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악생은 신분상 양인(良人)이고 다른 이들은 공천(公賤), 곧 관노비였는데, 희망할 경우 양인도 장악원의 악공이 될 수 있었다.

『세종실록』 세종 11년(1429)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옛날의 예에 의하여 무녀의 자질(子姪)과 놀고 지내는 양인들로 나이 13세 이상 20세 이하되는 자를 선택하되, 서울에서 30명, 충청도에서 30명, 전라도에서 35명, 경상도에서 40명, 강원도에서 15명으로” 숫 자를 할당해서 운영했다. 그 숫자는 달라지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각 지방의 관속 음악인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중앙으로 올라가 번을 섰으며 국가 행사가 있을 때 공연에 참여하고, 이들 중에는 한양에 올라가 번을 서는 신역(身役) 대신에 돈을 납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장악원의 재정과 소속 음악인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악생·악공 1인에 각각 3인의 지방 관속 악생보·악공보를 두고 세금을 걷었다.

또한, 각 지방에서도 취고수(吹鼓手), 취수(吹手), 세악수(細樂手), 기생, 악공(樂工), 전악(典樂) 등을 두었다. 이들 중 일부는 중앙 장악원 소속이고 일부는 지방 관아 소속이었다. 관찬 읍지를 보면, 이들 음악인이 항목을 달리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군병 항에만 있는 악생·악공·내취, 둘째 관직이나 관노 항에만 보이는 악공·기생·전악(典樂)·가동(歌童), 그리고 군병과 관직 항에 모두 보이는 취고수·취수·세악수의 세 부류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첫째 부류는 위에서 살펴본 중앙의 장악원과 병조 소속이며, 나머지 둘은 지방 관속 음악인이다. 이들은 각종 의전과 연향 등에서 다양한 공연에 참가했다.

관속 음악인들의 신분은 악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역공천(有役公賤)’에 속했다. 유역공천이란 천민 신분이면서 국가의 공적인 역을 맡는 것을 말한다. 중앙의 장악원 악공에 대해 적용하던 이 제도는 조선 중기 이후 천민도 군역에 편제되는 속오군 체제가 시행되면서 확대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음악인들은 자연스럽게 지방 관아의 군역 제도에 편입되어 통제되었다. 물론 관속 음악인이 관노비의 신분이었지만 반드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양인과 혼인을 하면 그 후손들은 면천이 되어 양인의 신분이 되기도 하였으나 흔치 않았다.

조선시대 관속 음악인들은 무속 집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무녀나 유한 양인의 자식들이 악공이 되었던 예에서처럼 처음부터 무속 집단과 관속 음악인은 연관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경상도 단성현에서 거주했던 화랑(花郞) 박진명 일가의 호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박진명의 손자 5형제 중에서 두 명은 무부이고, 두 명이 병영 취타수(兵營吹打手)였는데 그 중 한 명은 병영 취타수로 있다가 나중에 무부 활동을 했다. 또한, 증손자 중에도 무부 이외에 병영 취타수가 있었는데, 그는 후기 기록에 무부군노(巫夫軍奴)라고 기록되었다.

이처럼 같은 무당 가계에서 관속 음악인과 무부를 겸하거나, 변동이 되기도 하는 것에서 보듯이, 무속 집단과 관속 음악인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또한, 관속 음악인들의 공간을 지칭하는 악공청, 장악청, 재인청, 취수청 등을 지방에 따라 신청(神廳), 무부청(巫夫廳), 무청(巫廳) 등으로 부르거나 그렇게 기록을 남긴 데서 둘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호남읍지(함평현)』(1895)에 나오는, 무세(巫稅)를 거둬 무부 중의 우두머리인 도화랑(都花郞)과 고인[工人]에게 지급했다는 기록 역시 관속 음악인과 무속 집단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무부들이 관속 음악인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으며, 다음 항에서 살펴볼 신청 관련 활동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을 통해 무부들이 무업 이외에 중앙이나 지방 관아의 공식 행사에서 음악과 연희 등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무부들을 악공이나 세악수로 선발한 것은 신분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들이 대대로 무업에 종사해 온 전문 예술인이기 때문이었다. 무속 집단의 음악적·예능적 역량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우월하였으므로 이들이 관속 음악인으로 진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음악인들은 군현의 제례, 연향, 고을 수령의 행차, 과거 급제자의 문희연 등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이런 사실을 통해 굿이 다른 전통 예술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굿의 전통과 우리의 전통 연희가 밀접한 상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