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5. 무당의 대외 활동과 전통 예술
  • 무속 집단의 조직, 신청(神廳)
  • 전라남도 장흥 신청
이경엽

장흥 신청은 장악청으로도 불렸으며 장흥읍 기양리에 있었다. 신청 문서인 ‘신청완문(神廳完文)’의 작성 시기(1832년, 순조 32)로 볼 때 늦어도 19세기 초에는 설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에 해체되었다가 1919년에 중건되었으며, 지역 유지들의 찬조를 받으며 음악 전수 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장악청중건기(掌樂廳重建記)>에 의하면, ‘갑오난리’(1894)를 거치면서 ‘거의 없어져 버린’ 상태였는데 기미년(1919) 봄에 찬조금 511원을 모아 옛터에 새로운 청을 중건했다‘(舊址重建新廳)’고 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921년 11월에 외청 3칸(外廊三間)을 지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1919년에 중건하고 이후에 증축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에는 대동계라고 칭하는 무부계가 있었다. 장흥군 내 20세 이상의 무부들이 계원으로 참여하며 그 수는 100여 명 정도였다. 계원은 약간의 입회금과 매월 곗돈을 납부했으며, 이 돈은 신청의 유지비, 특히 선생안제(先生案祭) 비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청 에는 청주(廳主) 즉, 계장(契長) 1명, 공원(公員) 1명, 장재(掌財) 1명의 역원(役員)이 있었으며 청지기 1명이 신청 구내에 거주했다. 역원의 임기는 대개 1년으로 매년 정월 초사흘에 신청에서 대동계 회의를 열어 구두로 선출했다. 역원은 명예직으로 보수는 없고, 청지기조차도 단지 신청 구내에 거처를 얻어 안뜰 연못에서 자라는 미나리를 약간의 수입으로 여길 뿐, 특별히 수당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대동계 대회는 정월 초사흘에 열렸으며 1년 임기의 역원 선출 및 결산 회의를 하고 이날 가무 향연을 즐겼다.

장흥 신청에서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선생안제를 드렸다. 선생안제는 무단(巫團)의 선배 영혼을 제사지낸다는 의미가 있다. 신청의 방 한 칸에 신청의 취지, 규약과 선배들의 이름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란 책자를 봉안하고, 당일 선생안을 모신 사당을 열고 음식물을 올린 후 유교 제사 방식으로 4번 절한다. 이 선생안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무부로 제한되어 있고, 무녀는 참석할 수 없었다.

신청에서는 전통 예술 교육과 전수가 이루어졌다. 신청에서는 판소리, 시조를 비롯한 소리와 가야금·아쟁·양금·대금·피리 등의 악기 연주를 지도하고 연습했다. 20세기 초에 장흥 신청에서 음악 교육을 담당한 이는 신홍재였다. 그는 시조·판소리·가야금 등에 능한 예술가였고 명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했으며, 남도창 개발에 큰 공을 세운 예인으로 알려졌다. 신청의 음악 교육은 엄격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오전에 시조를 연습하고 오후에는 판소리, 춤, 가야금, 양금 연습을 밤에는 국악 이론을 공부했다고 한다. 곧, 오전, 오후, 저녁 시간의 교과목을 구분해서 체계적으로 강습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국의 명창들이 장흥 신청으로 찾아와 음악을 연주하는 기회가 많아 장흥은 대외적으로 율향의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장흥 신청은 1930년대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신청에서 음악 교육을 받은 후예들에 의해 그 예술은 지속되고 있다. 신청 출신 예인으로 주목되는 인물로 최옥산과 김녹주를 꼽을 수 있다. 최옥산은 가야금 산조의 한 유파를 확립한 인물이며, 그의 가야금 산조는 ‘최옥산류’라는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다. 그리고 김녹주는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에 능했던 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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