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5 서구인 굿을 보다
  • 01. 서구인이 기록한 한국 굿 자료
  • 서구인이 기록한 한국 굿 자료
  • 표트르대제 박물관 소장 자료
홍태한

1714년 러시아의 표트르대제가 지시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건립된 표트르대제 박물관은 1903년 표트르대제 인류학 민족지학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여기에 상당수의 한국학 관련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직원들이 찾아내어 2009년에 간행한 관련 자료를 보게 되면 20세기 초반부터 촬영된 상당수의 사진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가 당시 조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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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굿
다리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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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굿
감응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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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명의 연구자들이 모은 사진자료 중 1955년에 도유호가 평양 인근에서 촬영한 무당굿 관련 사진 몇 장이 눈길을 끈다. 뒷면에 다리굿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사진은, 남북 분단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평안도 지역 무속인들이 연행하다가 지금은 겨우 명맥만 남아 있는 다리굿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여서 반가움이 앞선다. 또 다른 사진에는 감응굿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리굿 사진에 등장하 는 무당과 동일한 무당이다. 이날 굿에서 무당이 장삼 위에 걸쳤을 것으로 보이는 가사 사진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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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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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유호가 촬영을 한 1955년이라면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던 시기로, 그때까지도 북녘에는 무당굿이 남아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간다. 러시아 학자는 왜 무당굿을 촬영했을까. 이국적인 풍물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 아니면 무당굿이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인식? 불행하게도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쉽게 구할 수 없다.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추측이 19세기말부터 우리나라에 왔던 서구인들의 기록이 상당히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방문한 여러 서구인들은 우리나라의 풍물에 대한 비교적 다양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당대의 ‘조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당대의 조선인들이 입고 있던 옷, 살고 있던 집, 생업 등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종교도 그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무당굿에 대한 여러 기록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왜곡되고 편향된 시선을 느낄 수 있지만, 무당을 천박하게 인식하여 거의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은 우리 지식인들과 달리, 지금 무속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정말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들을 보게 되면 서구인들이 우리의 무당굿을 객관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기록에는 기록자의 가치관과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서구인들이 기록한 무당굿 관련 자료에도 당연히 그들의 주관이 개입되 어 있다. 곧, 그것은 표트르대제 박물관에 남아있는 무당굿 사진에 나타난 촬영자의 의도와 상통한다. 낯선 것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과 함께, 문명의 세계에 속한 자신들이 바라본 야만적이고 이국적인 풍물에 대한 폄하의 시선이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표트르대제 박물관의 여러 유물들을 모아 도록으로 간행한 것은 한 번 쯤 우리를 바라보는 낯선 이들의 시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무당굿을 바라본 서구인들의 기록에 나타난 그들의 의식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그들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무당굿의 면면들을 살펴보아 자료적 가치를 찾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이 어떤 관점으로 무당굿을 보았는지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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