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5 서구인 굿을 보다
  • 02. 서구인이 본 무속과 굿
  • 서구인이 본 무속과 굿
  • 아손이 본 상문 물리는 굿
홍태한

서구인들이 보기에 조선은 무속의 나라였다. 상층 계층부터 하층 계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선인들이 무속을 숭배하고 있었다. 아손 크랩스트는 그의 책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Korea)』에서 “교회에 가야만 목사를 볼 수 있고 승려들은 모두 도시에서 쫓겨났지만 무당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임금이 기거하는 대궐이나 지게꾼의 초가집을 막론하고 출입이 자유롭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이 말은 아손을 안내한 서구인 피에르 형제가 한 말이지만, 아손이나 피에르나 모두 서구인이므로 무속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기본적인 관념이 드러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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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손의 책에 수록된 전등사 내부 사진
아손의 책에 수록된 전등사 내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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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손은 조선의 관문이라 할 강화도에도 갔다. 강화도의 대표 사찰인 전등사에 들러 절의 곳곳을 둘러보는데 여기에 흥미있는 사진이 하나 보인다. <전등사의 내부>라고 명기되어 있는 사진에는 무신도가 걸려있는 신당의 모습이 보인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는 클라크의 책에 수록된 <국사당 사진>과 같은 사진이다. 동일한 사진이 전혀 다른 곳에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2년 스웨덴에서 간행된 책과 1932년 뉴욕에서 간행된 책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수록된 동일한 사진, 이것이 서구인들이 한국 무당굿을 바라보는 기본 관념인 셈이다. 그들에게는 사실의 여부보다는 한국 무당굿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서대문 부근에서 그는 흥미있는 굿을 관찰한다. 바로 문상을 갔던 이가 돌아와 아플 때 하는 상문 물리는 굿이다. 지금도 무속인들은 상가집 가는 것을 대단히 꺼린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상가에 함부로 가지 말 것을 권유하고, 상가집을 다녀온 이가 있다면 상문을 벗기거나 물려야 한다고 하며 일종의 축귀 의례를 거행한다. 아손이 이 굿을 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상중에 있는 집을 찾아갔을 경우에는 고인의 죽음을 유발했던 귀신이 그 사람의 집에까지 따라와 거기서 또 몹쓸 짓을 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귀신들의 화를 입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병화나 재화 또 다른 유형의 재난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귀신의 화를 입은 줄 알게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바로 이때 무당들은 귀신들을 달래어 물러가게 한다. 무당은 조수 한 명을 데리고 병자의 집으로 간다. 이 조수가 병자의 곁에 앉아 귀신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바가지를 긁으면 무당은 춤을 추면서 귀신을 부른다. 춤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지며 무당이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면 귀신이 무당의 몸에 접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제 귀신은 무당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병자에게서 물러가는 조건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환자가 어떤 약초를 먹어야 할 것이라든지 복채를 더 내라는 등의 주문이다. 이 주문을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무당의 춤은 점차 누그러지고, 귀신은 무당의 몸을 빠져나간다.

지금 행해지는 상문 물리는 굿과 흡사한 내용이다. 무당의 몸에 들어온 귀신이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은 당시 무당이 강신무여서, 접신의 기능이 있고 공수를 주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함께 아손은 기우제를 지낼 때 작두를 타는 무당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바다의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고기잡이가 잘되게 하는 용왕과 통할 수 있는 무당의 능력에 대해 거론하면서, 이 때문에 무당의 주머니는 늘 두둑하고, 여러 사람들의 무지와 미신에 의도적으로 기생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처럼 아손 또한, 무속을 관찰하다가는 돈과 연결시키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손의 기록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점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소경인 판수에 대한 기록이다. 아손은 무당과 판수를 구분하여 판수는 점쟁이라고 보고, 그들은 주로 해몽, 태아의 성별 감별 등 모든 일에 관여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주사위, 동전, 한자 등을 이용해 점괘를 만들고 이를 풀이하고 앞날을 예언하여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크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금의 실상과도 상통한다. 지금도 선굿을 하는 무속인과 점사를 주로 풀어내는 무속인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한국 무속의 기본적인 본질은 그렇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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