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5 서구인 굿을 보다
  • 02. 서구인이 본 무속과 굿
  • 서구인이 본 무속과 굿
  • 비숍이 본 무당굿과 무속
홍태한

한국 무속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 또 다른 이는 비숍이다. 그녀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한국 무속의 여러 실상을 기록하였는데 지금 보아도 유용한 내용이 매우 많다.

비숍이 먼저 관찰한 것은 평양에서 열린 병굿이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관찰하던 그녀는 여러 조선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병굿을 보게 된다. 다른 서구인과 달리 비숍은 굿이 열린 공간과 굿을 담당한 사람들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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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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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이 열린 곳은 헛간이다. 중병에 걸린 한 남자가 누워있고 앞에는 돗자리를 깔았고 낮은 병풍을 둘러쳤다. 안쪽에는 떡과 밥, 삶은 닭, 콩나물, 그리고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으로 차린 상을 놓았다. 병풍 밖에는 세 여자가 앉아있는 데 그 중의 한 여자가 징을 치고 있다. 그들을 향해 무당이 서 있는데 장밋빛 비단옷과 얇은 담황색의 길고 품이 큰 옷을 입었으며 소매가 바닥까지 끌리고 있다. 이것은 평안도 무당의 복색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무당이 입고 있는 옷은 천익 계통으로 보인다. 색상을 고려하건대 황천익과 홍천익일 가능성이 높다. 천익은 대개 가망·산신·군웅 등의 신령을 부를 때 입는 옷이니 매우 중요한 굿거리를 비숍이 보았던 것이다. 무 당은 머리에 고깔을 쓰고 부채를 들었는데 춤을 출 때만 부채를 사용하였다.

비숍이 관찰한 굿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가끔씩 장구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접시에 돈을 모으더니 다시는 이 집에 근심이 없게 하라, 우리는 다시는 제물로 너를 달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원하면서 허기진 영혼을 위해 돈을 사방으로 뿌렸다. 무당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믿음에 따르면 무당에게는 강력한 귀신이 씌워있으므로 그의 주문은 굿을 통하여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쫓아내기 위해 귀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신이 너무 완강하여 그보다 더 완강한 귀신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보수와 제물을 요구할 것이다. 굿은 환자가 다시 회복하기 시작하였을 때인 다음날 아침 4시까지 1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주로 여자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은 울타리 주위에 서 있었다.

비숍은 황해굿인 철무리굿도 관찰한 듯하다. 현재도 황해도 만신들은 일종의 재수굿으로 철물이굿을 연행한다. 철따라 사람들이 몰려와 하는 굿이어서 철물이굿이라는 용어가 붙었다고 하는 이 굿은 황해굿 중 가장 보편적인 굿이다.

비숍은 이 철물이굿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철무리굿은 집안의 수호신에 대한 일종의 감사 기도인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치성을 드릴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가정의 재산을 모두 써버리기 때문에 1년내내 살림이 쪼들리게 된다. 이런 식의 안택굿은 2∼3년에 한 번 씩 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무당을 청하며 물신(物神)을 바꾸거나 깨끗이 한다. 약식으로 하지 않는 한 이러한 안택굿은 7일 동안 계속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간소하게 하는 경우 도 있다. 그 의식은 귀신을 불러 청원을 드리고 제물을 바치고 목욕재계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 가정의 수호신은 그 무당에게 헌신하여 그를 통해 미래를 제시해 준다. 어떤 경우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조상이 무당에게 헌신하는데, 이럴 경우의 모습은 측은하고도 익살스럽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이러한 굿이 교외의 만신 집에서 거행되며 사가에서 이런 굿을 하는 경우는 없다.

비숍이 다음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것은 무당에게 아이팔기이다. 이는 실제로 아이를 무당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복을 위해 아이를 무당의 수양아들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아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무당에게 팔기 때문에 딸은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의례를 거쳐 마침내 매매가 이루어지게 되면 무당은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밥그릇과 숟가락 하나를 집고 아이 매매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한 벌의 솜옷을 신당 안에 넣어둔다. 이것은 지금도 서울과 경기 지역의 무당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명다리>이다. 서울과 경기 무당의 신당 한쪽에는 단골 신도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있는 무명이나 광목천이 높게 쌓여 있다. 비숍이 만난 무당들도 명다리 걸기를 행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성주모시기>도 비숍의 기록에 등장한다. 성주는 한 집안의 으뜸가는 신으로 대주의 나이에 맞춰 성주를 새로 모신다. 비숍이 기록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주모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무당은 만신 집에서 참나무 막대 주위에 큰 종이를 묶고 그 것을 곧바로 세우고 신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무당은 집의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서 성주를 찾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무당이 들고 있는 신장대가 흔들림으로써 성주가 접신했음을 드러낸다. 그 흔들림이 어찌나 격렬한 지 몇 사람이 잡아도 요동을 멈출 수 없다. 이런 후에 집으로 무당이 돌아오게 되면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종 이를 접어 붙여 만든 신장대에는 약간의 종이가 걸려있는데 이를 술에 적셔 대들보에 매달아 놓은 다음 밥풀로 붙인다. 그곳은 이제 성주가 거처하는 신성 공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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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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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비숍은 주로 점을 치는 판수가 어떤 순서로 악귀를 물리는지를 보여준다. 먼저 산통에서 괘를 뽑아 악귀가 어떤 악귀인지를 확인하고 길일을 택한다. 판수는 참나무나 소나무 지팡이를 준비하고 다듬잇돌 위에 똑바로 선 다른 한 사람이 이것을 붙잡도록 요청한다. 막대기가 흔들리고 다듬잇돌 위에서 춤을 출 때까지 주문을 반복한다. 이러한 행위는 귀신이 지팡이로 들어간 결과라고 믿는다. 이 단계에서 판수는 귀신의 이름과 성격, 그리고 해코지의 원인에 대한 점의 정확성을 시험한다. 판수가 물었을 때 지팡이가 움직이면 긍정의 뜻이고 조용하면 부정의 뜻이다. 악귀가 사라진다고 하면 이 부분에서 몰아낼 수도 있다.

그런데 악귀가 나가지 않으면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복숭아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귀신을 쫓는 데 대단히 효험이 있는 나무로, 다른 판수가 이것을 잡고 선다. 판수가 옆에서 경을 읽자 격렬하게 복숭아나무가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군이 등장하는데 장군은 귀신을 잡기 위해 나와 판수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판수가 장군에게 귀신을 잡아줄 것을 부탁하자 장군이 귀신을 잡으러 나간다. 계속 떨고 있는 나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다. 큰 주둥이가 있는 병을 마루에 놓는다. 부정한 귀신의 이름이 새겨진 종이를 그 병과 나란히 놓는다. 신장대에 붙은 종이가 병으로 들어가면 즉시 병의 마개를 닫아 언덕이나 골목길에 묻는다.

비숍은 자신의 글에서 무속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지적 기여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여행이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니었음을 내세운다. 무속을 비롯한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진행하는 비숍의 시선에서 한국은 관찰과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비숍의 글에 나타난 무속에 대한 이야기는 10여 년 후 『전환기의 조선』을 쓴 게일에 그대로 전재되어 나타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숍의 글은 그의 저작물 34∼35장에 나누어 기록되어 있다. 비숍은 자신이 보았던 여러 무당굿에 대한 기록과 함께 한국 무속의 일반적인 정황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 비숍은 최초로 무속을 연구한 서양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숍이 제공하는 무속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비숍은 무당의 중요한 기능으로 정화의 기능과 신탁을 들려주는 기능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무당의 기능이라기보다는 무당굿을 주재할 때 무당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화의식은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부정청배>를 말한다. 모든 굿을 시작하기 전에 굿청을 정화하여 더러운 것을 물린 후 여러 신령들을 불러모시는데 이를 비숍은 정화의식이라 했다. 무당이 여러 신령을 불러들여 축원과 제물로 좌정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는 설명에서 굿의 초반부인 청배의식과 상통한다. 신탁을 들려주는 것이 조선에서 무당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을 지적한 비숍은 그 방법의 다양함을 제시한다. 직접적인 해답을 들려주는 경우도 있고, 성스러운 종을 치거나 쌀 점에 의해 답을 얻기도 한다. 이는 선굿을 하면서 직접 공수를 주는 것과 점을 치면서 신의 뜻을 풀어 전달하는 것을 모두 합하여 말한 것으로 강신무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비숍은 무속에서 숭배되는 신령들에 대해 말한다. 오방장군은 5명으로 다섯 방위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만신 집에는 이들을 위한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8만 명에 이르는 귀신의 장군을 신장이라고 부르는데 조선의 중부 지방의 무당들에 주로 보인다고 한다. 도깨비는 가장 두렵고 혐오스러운 존재이면서 가장 잘 알려진 집단이라고 파악했다. 비숍이 듣고 정리한 도깨비의 모습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도깨비의 모습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도깨비들은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의 영혼으로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도깨비들은 형장인 전쟁터 또는 많은 사람이 죽은 장소에 나타난다. 그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빈집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나타나 사람들을 떨게 만든다. 도깨비는 서울의 경복궁 접견실에 나타나 이곳을 못쓰게 만들며, 그에 대해서는 끔찍스러운 얘기들이 나돌고 있으며, 그 장엄한 건물에 밤이면 그들이 나타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비숍의 도깨비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깨비가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가리키는 수비와 영산(靈山)일 가능성이 높다. 무속에서 도깨비는 흔히 도깨비 대감으로 모셔지며 재물을 주는 신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도깨비에 대한 기록, “도깨비들의 물신은 아마도 오래 되고 더러워진 작은 밀집 오두막에 안치된 마부의 모자나 벼슬아치의 갓과 같은 것들이다.”라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와 일치한다. 이로 보아 비숍은 도깨비와 수비, 영산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인이다 보니 잡귀 잡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이들을 합하여 ‘악마의 집단’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비숍은 산신령과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 서낭당, 토지신과 천신, 성주, 터주, 업주, 조왕신, 제석, 삼신에 대해 기록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삼신에 대한 언급이다. 비숍이 말하는 삼신은 오늘날의 삼신과 거의 일치한다. 곧, 임신과 출생의 신이라는 점, 가세를 번창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 모든 어린이들을 4살까지 돌본다는 점, 임신부가 장례식에 가거나 죽은 동물을 보게 되면 부정을 탄다는 점, 산모와 아이가 출생 후 21일 동안 격리되면 반면에 양반은 100일 동안 격리된다는 점에서 아기를 점지하고 태어나게 하는 삼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비숍은 이를 엉뚱하게 삼신할아버지라고 명명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삼신이 할머니라는 사실과 어긋난다. 비숍이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삼신에 대해 조사했는지가 빠져 있어 사실 확인이 어렵지만, 과거와 지금의 삼신관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비숍이 자신의 주관대로 해석한 결과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이렇게 여러 신령들에 대해 언급한 비숍은 랜디스의 견해라면서 조선의 신령 체계를 제시하였다. 비숍이 나눈 신령은 서열상 높은 신, 집안에 있는 신, 기타의 신 등 세 부류이다. 서열상 높은 신을 천신, 지신, 산과 언덕의 신, 용신, 마을의 수호신, 불교에서 온 신으로 나누었는데 분류의 기준이 대단히 모호하면서도 당대 조선인들이 어떤 신령들을 높은 신령으로 받들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집안에 있는 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대들보의 신, 재물과 가구의 신, 이왕실의 수호신, 부엌의 신, 이왕실을 보좌하는 신, 조상을 돌보는 신, 이왕실을 보호하고 시중드는 신, 마술사를 돕는 신, 물건이나 소지품을 보호하는 신, 역신, 동물의 형태를 띠는 신, 젊은 여자들에 내려 그들을 무당으로 바꾸는 명도신, 북두칠성신, 집터의 신 등이 있는데, 이러한 신들의 이름은 대단히 모호하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도 이름과 성격이 사뭇 다르다.

기타의 신으로 구분한 것은 잡귀 잡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역시 모호하다. 이에 속하는 신들은 남자를 용감하게 하는 신, 나무 에 기거하는 신, 호랑이로 하여금 사람을 잡아 먹게 하는 신, 사람을 길에서 죽게 만드는 신, 집 주위를 돌면서 온갖 재앙을 일으키는 신, 살마을 객사시키는 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게 하는 신, 교살에 의해 사람을 죽게 하는 신, 물에 빠져 죽게 하는 신, 출산하다 죽게 하는 신, 자살하게 만드는 신, 불에 타 죽게 만드는 신, 맞아죽게 만드는 신, 떨어져 죽게 만드는 신, 흑사병으로 죽게 만드는 신, 호열자로 죽게 만드는 신 등이다.

비숍은 강신무의 신병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오늘날 강신무의 입무 과정과 거의 유사하여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무당은 세습적인 경향을 갖는다. 하지만 신이 내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무당이 되는데 이럴 경우에 빈부귀천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신이 내리는 첫 단계에서 그녀는 조금 혹은 심하게 아프며 그 병은 4주 혹은 3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 그 기간에 그녀는 꿈, 무지개, 꽃 핀 복숭아나무 혹은 갑자기 동물로 형상화되어 갑옷을 입은 남자의 꿈을 꿀 것이다. 이러한 꿈들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되었다가 환각에서 깨어났을 때 신기한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머지 않아 신탁처럼 말을 한다. …… 그런 후에 그녀는 죽은 무당의 직업적인 도구와 옷들을 얻어야 한다. 딸에게 확실히 강신(降神)이 되면 어미 무당은 자신의 옷을 없애도 괜찮지만 북과 다른 악기들은 남겨두어야 한다. 새로운 무당은 죽은 무당의 이름을 서판(書板)에 쓴 후에 그것을 조그마한 방에 모셔놓는데 이는 3년 동안이나 죽은 무당의 축복을 기원하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비숍의 글은 무당굿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주고는 있으나 일목요연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자신의 관심사항에 따라 나열하면서 기록한 글이다. 무엇보다도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한 부분이 여럿 보여 혼란스럽다. 비숍이 글의 말미에 지적인 기여를 하고 싶다고 밝혀두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지적인 열망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기록을 참고로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기 식으로 풀어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비숍이 서구인이면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다 보니 꼼꼼하게 관찰은 하고 있지만,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면에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비숍이 조선을 여행할 때 관청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자료의 여러 문제점을 가져왔다. 민중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이방인의 관찰자적인 시각에 머물렀다.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다 보니 깊은 성찰과 이해를 수반하지 못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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