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5 서구인 굿을 보다
  • 04. 굿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
  • 굿을 바라보는 시선-낯설어하며 따지기와 왜곡하기
홍태한

서양인들이 한국 무속을 처음 접하면서 가진 느낌은 낯설어하기이다. 지금도 한국 무속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도 이러하니 100여 년 전 서양인들이 한국 무속을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낯설어하면서도 자신이 관찰한 한국 무속의 모습을 기록하려는 자세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들이 조선에 들어올 때부터 조선을 관광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으로 여기고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초가집의 생김새부터 서울의 밤풍경까지 묘사할 정도로 꼼꼼한 관찰력을 가진 그들이 자신이 눈으로 본 한국 무속의 여러 양상을 세밀하게 기록하지 않을 리 없다.

서구인이 조선에 들어와 처음 느끼는 감정은 호기심일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곧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풍물에 대한 상세한 관찰, 묘사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이방인이 조선의 문화나 사람을 단번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은 모든 대상이 내면 화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세계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는 서구인들에게 일체감을 주기보다는 거리감을 준다. 결국 조선의 풍물과 사람은 낯선 외부의 세계일 뿐,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무당굿은 더더욱 낯선 존재일 것이다. 자신들이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느껴 미신이라고 치부한 것이 버젓이 신앙의 형태로 남아있으니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한국 무속의 여러 실상을 기록한 서양인들은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서양인들 기록에서는 한 가지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한국에는 종교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어 유교와 불교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귀신이고 이 귀신이 부리는 존재가 무당이라는 것이다. 귀신은 한국인들을 짓누르고 있으며 이 귀신을 달래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한 데에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중심의 사고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무속을 설명하면서 한국인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며, 기독교의 하나님과 비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새비지 랜도어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무당은 늘 귀신의 어려움을 풀어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대가로 돈을 받는다고 기록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들은 한국 무속이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일이 『전환기의 조선』에서 한국에는 종교다운 종교가 없으며 귀신은 일생 동안 한국인을 억압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이들은 한국 무속을 선입견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무속을 시베리아 무속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분석하면서도 시베리아 무속을 중심에 두고 분석하는 클라크의 『고대 한국의 종교』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무속을 한 장으로 독립하여 기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속은 마법과 악령을 어루만지기 위한 제례가 혼합된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무속 자체에 대한 언급보다는 용, 봉황, 거북, 기린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설명한다. 무속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한 비숍은 여러 부분에서 한국 무속을 경시하는 내용을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무속이 귀신이다라고 단정적인 말까지 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은 지적 호기심과 분석의 대상,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한국 무속의 실상을 왜곡하는 모습도 서양인의 기록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무속에 등장하는 귀신이 인간을 억압하는 존재라고 기본적으로 전제한 것이 왜곡의 시작이라면, 판수와 무당이 사회악이어서 민비의 시해와 함께 타격을 받았다고 한 비숍의 기록은 왜곡의 절정이다.

커즌이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에서 한국인들은 미신에 끌리기 때문에 무녀를 찾는다고 본 것도 무속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탐구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무속을 바라본 예이다. 새비지 랜도어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무당들은 굿을 해 번 돈으로 밤새 술마시고 흥청대는 데 탕진하고, 대개 파렴치하고 비도덕적이어서 명문가의 음모나 심지어는 살인 등의 끔찍한 범죄에도 연루된다라고 기록한 것은 당시 무속의 부정적인 측면을 알려주는 자료이면서 무속의 한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사례이다. 지금도 무속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니 서양인들이 이런 시선을 가진 것 자체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퍼시벌 로웰이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사람들』에서 장승을 한국 무속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장승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애정을 보여주다가, 조선인이 소박하기 때문에 동기만 부여하면 종교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한 것은 한국인의 원형적 심상을 무시한 처사이다. 이러다 보니 와그너가 『한국의 아동생활』에서 무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여러 신격을, 유일신인 하나님을 희화화한 것이라고 기독교 중심의 발언까지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아손 그랩스트는 무당에 대한 언급을 하다가 뜬금없이 기독교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맞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퍼시벌 로웰이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에서 한국에는 당파가 둘 있었는데 유교를 지지하는 세력이 당파 싸움에서 불교를 지지하는 세력을 이기는 바람에 불교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 때부터 한국의 종교에는 여러 문제가 생겼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무속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말 그대로 오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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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가 찍은 무당
클라크가 찍은 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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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식은 무속의 모든 것을 돈으로 연결해 해석하는 시각에서도 보인다. 클라르 보티에는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에서 굿의 연행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다가, 마지막에 무당이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자 매우 불쾌하게 여기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친다. 그리고 많은 기록에서 무속과 돈을 연결해 무속의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것도 무속의 본상을 알지 못한 왜곡의 한 단면 이다. 이리하여 베네데크는 『코리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한국의 무속 신앙은 이 세상에 나쁜 영혼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본다고 기술함으로써 무속의 의미를 일축해 버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 무속을 왜곡하고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이 찍은 굿하는 장면의 사진에서 명료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앞에 제시한 루이 마렝이 찍은 사진과 클라크가 찍은 사진에 굿을 하는 무당의 모습이 있다.

그런데 이들 사진 속에 등장하는 무당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하고 무구를 든 양손을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하나의 전시품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국 무속을 바라보는 시각이 객관적이었다면 그들은 굿하는 장면을 그대로 찍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굿이 멈추어진 시간, 또는 굿을 중간에 멈추게 하고서 무당들에게 손을 들게 하여 찍은 것이다.

아무리 한국 무속을 관찰하고 기술한 자료적인 성과가 있지만 이러한 사진을 보게 되면, 당시 무당들이 어떤 느낌으로 사진기를 바라보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은 그냥 스쳐가는 전시품같은 곳이었고 지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무속의 여러 단면을 탐구했지만, 가장 중요한 무속 담당층인 무당을 하나의 사물로 여겼다는 데에서 무속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들 서구인을 바라보는 무당의 시각도 드러난다. 낯선 이들이 낯선 기계를 가지고 와서 촬영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기꺼이 사진기 앞에 섰다. 이방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과 요구에 선선이 응해 준 것이다. 당시에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그 긴 시간을 참으면서 서구인들의 요구를 들어준 무당은 선입견을 가지고 왜곡하는 서구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다. 이는 한국 무속이 가지고 있는 열린 세계관의 반영이 다. 어쩌면 서구인이 무당들을 관찰 조사한 것이 아니라, 무당들이 서구인을 관찰하고 조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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