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3. 분화되는 히에로파니
  • 간다라 불상 제작기법의 전래
서치상

7세기 후반 신라의 불교문화는 인도, 서역 및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로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간다라의 불상 제작기법이 소개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불상은 기원 전후 인도 마투라와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제작되었다고 한다. 오랜 동안 불상이 없었던 것은 초월적 존재인 부처의 형상화가 신성모독으로 취급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세가 커지고 신도 수가 크게 늘면서 승려들의 전유물이었던 경전 설법 외에 가시적인 예배 대상이 요구되었다. 때마침 동·서의 교역지였던 간다라지역으로 헬레니즘 조상 기법이 전파되고, 이에 따라 불상 제작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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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때 전래되었을 간다라 지방의 불상
통일신라 때 전래되었을 간다라 지방의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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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불교가 전래될 때 불상도 함께 가져왔다는 기록을 근거로 4세기 중반부터 불상 제작이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한강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나 평양 원오리 폐사지의 소조 불좌상,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의 금동불좌상도 모두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불상들은 높이 5∼20㎝ 내외로 옮기기 쉬운 것들이다. 중국에서 가져왔거나 모방한 것들로 금당에 안치하던 등신 이상의 크기가 아니라서 개인 거처에 모셨던 예불용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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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한강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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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566년(진흥왕 5)에 황룡사 의 장륙(丈六) 금동삼존불상을 주조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그 불상을 받쳤던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이로써 대략 6세기 후반부터 등신 크기 이상의 불상을 금당에 안치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나 중국 불상의 모방에서 벗어나 신라 고유의 양식으로 불상을 제작한 것은 7세기 이후부터였다.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된 불·보살상을 금당에 안치함으로써 가람의 중심은 금당으로 바뀌어 갔다. 반면에 진신사리를 모셨던 탑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장려한 단일의 1탑이 보다 작은 규모의 2개의 탑으로 바뀌고, 목조 누각건축의 형식을 흉내낸 석탑으로 대체되었다. 2탑의 위치도 일곽 전면부로 당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탑에 모실 진신사리도 부족한 형편이어서 불경을 법사리(法舍利)라 하여 진신사리 대신 봉안하기도 했다.

종전까지 히에로파니의 중심이던 탑의 위상이 낮아지는 대신 금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비슷했다. 718년에 완공된 일본 나라(奈良)의 야쿠시지(藥師寺)가 대표적이다. 불상의 제작은 1탑 중심에서 금당이 중심인 2탑식으로의 변화를 야기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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