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5. 산간에 들어서는 비보사찰
  • 화엄의 일승사상과 성지신앙
서치상
확대보기
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
팝업창 닫기

7세기 후반의 감은사지나 8세기 중반의 불국사는 도성에서 벗어난 산기슭에 세워졌다. 깊은 산속 계곡이 아니라 완만한 경사 구릉이므로 석단 등을 쌓아 조성한 평탄지에 회랑으로 둘러싼 방형 일곽 안에 일렬로 중문·탑·금당·강당 등을 세웠다. 적극적으로 지 형조건을 개조해서 정형적인 가람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불국사를 끝으로 평지가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산간의 넓은 평지에 짓더라도 회랑으로 둘러싸서 주변과 강하게 분리되는 정형적인 일곽을 만들지 않았다. 불전 앞 두 탑을 대칭으로 세우는 정도였고 나머지는 지세에 따라 적절히 안배했다. 이제부터 가람은 만다라가 아니라 종지를 닦고 수행하는 승원으로 변해 갔다.

확대보기
통도사 산문과 그 뒤로 보이는 영축산
통도사 산문과 그 뒤로 보이는 영축산
팝업창 닫기

이러한 사찰로는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10찰, 율종의 통도사, 법상종의 금산사나 법주사 등이 있다. 종파별로는 의상을 개산조로 한 화엄종 계열의 사찰들이 가장 많았고, 자장을 개산조로 하는 율종 계열의 사찰들도 더러 있었다. 이 사찰들은 모두 개산조의 기이나 영험을 창건연기로 삼았다. 창건연기는 대부분 왜구를 물리치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세력을 물리치는 항마설화적 내용이다. 그 무렵 군사적인 삼국통일은 이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분립 상태였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탈에 대비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엄사상은 완전한 통일국가의 정치이념으로서 뿐만 아니라 부처의 힘으로 국가를 보위하고자 했던 불국토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화엄경이 그 무렵의 지배계층에 크게 환영받았다.

화엄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이래 기존의 노장사상 등 여러 전통사상과의 습합을 통해서 광대무변하고 심오한 깊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난해한 탓에 지배계층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은 반면, 일반에는 염송이나 예불 같이 단순한 기복신앙이 널리 유행했다. 화엄경의 연화장 세계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과 융합을 끝없이 전개하는 약동적인 생명체로서 궁극적으로 불·법·승의 삼보로 귀결된다. 그것이 화엄일승이고, 그래서 화엄을 통화불교나 일승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으로 일컫는다. 대립과 항쟁으로 분열된 사회의 통합원리로 더없이 적합한 사상이었다. 그 무렵 지배계층이 화엄의 일승사상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았던 이유이다.

화엄경에는 중국에 봉우리가 다섯이어서 오대산으로도 일컫는 청량산이 있는데 문수보살이 권속 1만의 보살과 함께 법을 설한다고 했다. 또한,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법기보살이 권속 1만 2천의 보살과 함께 법을 설한다고도 했다. 오대산과 금강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이른바 성지 신앙이다. 원래 이 산들은 인도나 중국의 이름난 불교 성지였다. 석가모니가 설법했다는 인도 마갈타국의 기사굴산(Gijjhakuta)이 영축산, 천제석이 있다는 철위산(Cakravada)이 금강산, 그리고 중국 산서성 오대현의 우타이샨(Utaishan)이 오대산 또는 청량산이란 이름으로 신라 곳곳의 산이름에 붙여졌다. 그래서 신라의 영토는 아득한 전불시대(前佛時代)부터의 일곱 가람터가 있는 부처의 땅이라는 불국토사상으로 발전했다. 전래의 산악숭배사상에다 불국토사상을 습합시켜서 명산 곳곳에 가람을 세우고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화엄사상의 유행이 산지가람의 출현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러한 화엄계열 산지가람의 배치 형식은 응당 화엄경을 기본으로 이뤄졌을 것이지만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가람들이 여러 차례의 인멸과 중창, 이건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 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의 연구 중에서 676년(문무왕 16) 화엄10찰의 수사찰로 처음 건립된 부석사의 공간구조가 화엄경의 원리에 따랐다고 해석한 경우는 있다. 화엄경의 연화장 세계가 34품을 7처 8회라는 부처의 설법처와 거기 모인 중생의 회로 설명하고, 이를 다시 초지에서 10지의 수행단계로 서술된 점에 착안한 것이다. 예컨대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10개의 석단이 바로 10지의 수행단계를 상징한다고 했다. 또한, 주불전이 무량수전인 만큼 무량수경의 삼배삼품론 또는 삼배구품론, 즉 현세에서의 근기에 따라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9단계가 종축상의 상중하 3단이나 9개의 대석단으로 상징화되었다는 것이다.

확대보기
범어사 비로전
범어사 비로전
팝업창 닫기

물론 여기에는 지금의 가람구조가 창건 때부터 형성되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어떻든 경전의 내용을 가람배치의 도상으로 삼고자는 의도는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순천 송광사에 전해지는 문헌 중에 의상이 화엄경의 원리를 도상화한 화엄일승법계도의 체형으로 짓고자 했다는 내용이 그 예이다. 이처럼 신라 승려들은 특정 사상에만 고집하지 않고 두루 섭렵한 때문인지 특정 종파의 사찰이라도 반드시 그 경전의 내용만을 근거로 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부 석사의 주불전은 정토신앙에 근거한 무량수전으로 아미타불을 모셨다. 화엄십찰의 하나였던 범어사의 창건사적에도 주불전은 미륵불을 모신 중층의 미륵전이었고,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전이 부불전으로 함께 기록된다. 다양한 신앙형태를 아우르는 불전들이 가람 일곽에 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