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6.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 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의 성립
서치상

9세기 초에 선종이 전래되면서 불교계는 전례 없는 일대 변혁을 맞이했다. 선종은 경전에 의존하던 교종과 달리 참선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했다. 그 핵심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는, 그러나 교법 외에 따로이 전하는 것이어서 글로는 세울 수 없고 말과 글의 길이 끊어진 상태에서 직입적으로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스스로의 성품을 보아 성불한다(以心傳心 敎外別傳 不立文字 言語道斷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이었다. 경전이나 의식은 물론이고 불·보살상의 예불까지도 부정하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선종은 교종이 장악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에 사찰을 짓고 새로운 사상을 전파해 갔다. 828년(흥덕왕 3) 홍척을 개산조로 창건된 실상산문의 실상사를 비롯해서 가지산문 보림사, 동리산문 태안사, 사굴산문 굴산사, 성주산문 성주사, 사자산문 흥령사, 희양산문 봉암사, 봉림산문 봉림사, 수미산문 광조사 등 전국에 걸친 구산선문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교종사찰들과 친화, 융합하 는 대신 반목과 사상적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교종은 선종을 현실세계와 철저히 유리되어 삼보의 법통을 무시하는 치선(痴禪)이라 비웃고, 선종은 교종을 문자에만 매달려 부처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광혜(狂慧)라고 비웃었다. 선·교의 분쟁은 불교 교단 내부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대척관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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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 실상사
전라북도 남원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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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이 전래될 무렵의 중앙권력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반면에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호족세력이 성장하면서 중앙권력과 대립적 관계를 형성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호족세력들은 선종을 크게 환영했다. 구산선문 중에서 실상사와 태안사, 보림사 등 3사찰이 융성했던 것도 전라도 무주지역의 호족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그 무렵 이 지역에서는 장보고의 반란이 발생했고, 진압 후에도 그 여파가 남아 있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그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던 대표적인 호족세력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골품제 사회를 지탱하던 교종과 대립하던 선종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기반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었다.

다소 의외이지만 선종은 지방 호족들 외에도 왕실이나 개혁성향의 귀족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문성왕이 동리산문 태안사를 연 혜철의 선풍을 전해 듣고는 여러 차례 격려 서한을 보내어서 산문을 보호하라는 어명을 내린 적이 있고, 중앙 귀족 중에서 사찰 조영에 크게 호응한 이들도 있었다. 기존 지배세력의 기반인 교종과 대립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대가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때 관청에서 작성한 일종의 건물대장으로 추정되는 「태안사형지기」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여기에는 금당·식당·승당·선법당·나한전·대장당·경방채·유나채·목욕방채·삼보고청·수가·측간·조사당 등과 각종 누각·문·좌우 익랑 등 40여 동의 건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실상사의 「실상사사적기」에도 창건 때의 건물로 8전 8방을 비롯해서 많은 누각과 문들이 나오는데, 이는 새로이 전래된 선종이 빠르게 그 기반을 확립해 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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