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8. 산중 승단과 불교의 중흥
  • 전란 피해 복구를 위한 조영활동
서치상

임진왜란의 피해는 어느 사찰이든 예외가 없었지만, 왜병과의 전 투가 치열했던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더욱 심했다. 왜군이 처음 쳐들어 온 부산 지역의 범어사는 360방사가 소실된 후 10명 남짓한 승려들이 초막에 거처하는 형편이었고, 직격로에 위치한 경주 지역의 불국사는 100개 방, 2천여 칸이 불타버렸다. 정유재란 때의 격전지였던 지리산 일대의 화엄사는 8원, 81개 암자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인근의 쌍계사나 송광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대부분의 사찰들은 조락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확대보기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각황전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 각황전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대웅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대웅전
팝업창 닫기

이에 전쟁이 끝난 후 대오를 풀고 각자 사찰로 돌아간 승려들은 피폐해진 가람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주불전을 짓고, 강당과 요사채, 삼문 등을 지어 나갔다. 오늘날 남아있는 주불전들이 대부분 임진왜란이 끝난 후 20∼30년이 지나면서 건립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대표적으로 관룡사 대웅전(1617), 전등사 대웅전(1621), 법주사 팔상전(1626), 금산산 미륵전(1635), 내소사 대웅전(1636), 화엄사 대웅전(1636), 송광사 약사전·영산전(1639), 통도사 대웅전(1645) 등을 들 수 있다. 이보다 조금 늦은 경우로는 장안사 대웅전(1658), 용문사 대웅전(1670), 범어사 대웅전(1680), 쌍계사 대웅전(1680), 선운사 대웅전(1682), 화엄사 각황전(1703), 운수사 대웅전(1703), 쌍봉사 대웅전(1724) 등이 있다. 대부분 피해가 심했던 삼남 지역에 위치한 사찰의 주불전들이 이 무렵에 복구되었다.

확대보기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 대웅전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 대웅전
팝업창 닫기

삼남지역 사찰 조영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이는 앞서 두 차례의 전란과 1624년(인조 2)의 남한산성 축조에서 큰 공을 세웠던 각성이다. 불교계 안팎으로 명성이 높았던 각성은 전란 중에 부여된 국가적 소명을 다한 후 사찰로 돌아와서는 불교 중흥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는 봉은사·화엄사·실상사·쌍계사·칠불사·법주사·가섭암·해인사·신흥사·청계사·송광사·탈골암·상선암 등 전국 각지의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가람의 중창을 주도했다.

각성의 중창에 의해서 대가람의 면모를 회복한 사찰로는 지리산 화엄사와 쌍계사가 대표적이다. 각성은 1630년(인조 8)에 시작해서 7년 동안 제자들과 화엄사에 머물면서 대웅전과 요사 등을 새로 지어서 가람의 일부를 복구했다. 1641년(인조 19)에는 쌍계사로 옮겨 서 불타 없어진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복구했다. 이 밖에도 송광사·봉은사·실상사·칠불사·법주사·해인사 등이 각성의 손에 의해서 복구되었다. 오늘날 보는 이 사찰들의 면모도 대부분 각성의 조영 활동 덕분이었다. 조선왕조의 억불정책 하에서 신음하던 불교계가 각성의 노력으로 다시 중흥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확대보기
1635년 중건된 금산사 미륵전(1920년대)
1635년 중건된 금산사 미륵전(1920년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충청남도 부여 무량사 극락전
충청남도 부여 무량사 극락전
팝업창 닫기

불교계의 복구활동은 전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그 무렵 일본이나 청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이앙법의 보급과 농기구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나 상공업도 몰라보게 발전했다. 여기다가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무하는 데는 불교만한 것이 없었다. 17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많은 사찰에서 가람을 중창할 때 지역 관부와 유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대거 시주에 동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했던 배불 군주 인조도 죽기 1년 전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승려로 하여금 자신의 생부인 원종의 명복을 빌게 했고, 효종은 즉위 전에 안주에서 만난 각성이 화엄 종지를 담론하는 것을 보고 크게 찬 탄하고는 후하게 시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각종 불사에 왕실의 시주도 빈번히 이뤄졌다. 1699년(숙종 25)에 앞면 7칸, 옆면 5칸의 장려한 중층 건물인 화엄사 각황전을 중건할 때 왕실에서 많은 돈을 시주하고 사액까지 했다. 이 밖에도 김제 금산사 미륵전(1635)이나 부여 무량사 극락전과 같은 장려한 불전건물들도 왕실의 시주에 힘입어 건립될 수 있었다. 다만, 조선 전기와 달리진 것은 국가재정이 아닌 시주전의 형태로 지원된 점이다. 사교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유생들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공사재원은 마련해 주되 불교 교단 내의 일로 한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