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8. 산중 승단과 불교의 중흥
  • 사판승의 자급자족적 공역활동
서치상

17세기 후반부터 사찰 경제가 호전되면서 건물 짓는 일도 한층 수월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불교 교단 자체의 일이었다. 간혹 왕실원당을 설치할 때 관부에서 관공장이 파견된 경우는 있 었지만, 대부분은 승려들 스스로 건축 공장과 역부로서 공역을 도맡아야 했다. 물론 승려들의 공역 활동은 오래 전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고려 때의 경우 1308년(충렬왕 34)의 수덕사 대웅전 묵서명에 중비라는 승인 공장이 대지유로, 1377년(우왕 3)의 부석사 조사당 묵서명에는 선사 심경과 의홍이 각기 대목과 화원으로 기록된다. 또한, 조선 전기인 1430년(세종 12) 무위사 극락보전, 1473년(성종 4)의 도갑사 해탈문, 1490년(성종 21)의 송광사 미륵전, 1530년(중종 25)의 성불사 응진전 등의 묵서명에도 승려들이 대목이나 화원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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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전라남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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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승려들 스스로 공장이나 역부로 일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의 하나로 보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관행에서 비롯된다. 다만, 고려 때까지 사찰 노비가 노동력이던 상황에서 승려의 공역은 이러한 수행의 일환이었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승려들이 곧 사찰 노동력의 전부인 상황에서 화주승·감동승·공장승·조역승 등을 스스로 맡아야 했다. 그런 사정으로 웬만큼 큰 사찰들은 자체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승인공장들을 보유해야만 했다. 18∼19세기 동안 사찰 건물을 짓는 일은 이러한 승인 공장들이 전 적으로 책임졌다. 일부 민간 공장들이 참여할 때도 언제나 승인 공장이 공역 책임자였다. 특히, 지방사찰의 경우는 승인 공장들이 민간 공장들에 비해서 수가 많았고 기술도 뛰어났다. 그 무렵의 송광사나 범어사와 같이 큰 사찰의 조영조직은 해당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기술집단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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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대웅전
직지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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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뛰어난 승인 공장들은 소속 본·말사 외에도 먼 거리의 사찰이나 심지어 관아나 향교 공사 때도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초반 부산지역에서 장기간 활동한 범어사 소속의 조헌이란 승려를 들 수 있다. 그는 1700년(숙종 26) 범어사 보제루 창건 공사를 시작으로 1712년(숙종 38)의 대웅전 중창 공사와 천왕문 중창 공사에서 도대목으로 기록되며, 1708년(숙종 34)에는 말사인 해월사 법당 창건공사에서 도목수로 일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뿐만 아니라 1704년(숙종 30)의 동래향교 이건 공사와 1706년(숙종 32)의 동래부 향청 이건공사 때도 휘하 승인 공장들을 지휘했던 도대목으로 활동했던 최고기술자였다.

먼 거리의 사찰에까지 가서 일했던 경우는 동래 운수사 소속의 치백을 들 수 있다. 그는 1700년(숙종 26) 본사인 범어사 보제루 창 건 공사와 1716년(숙종 42)의 대웅전 중창 공사 때 편수로 일했다. 이후 1736년(영조 12)에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중창 공사에서 상대목을 맡았는데, 그 휘하에서 편수로 일했던 찬열과 원신도 각기 창원과 현풍에 있는 사찰의 승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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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선암사 대웅전
1920년대 선암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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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선암사 대웅전
현재의 선암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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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송광사 소속의 계묵은 일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대표적인 공장이었다. 그는 1839년(헌종 5)부터 1855년(철종 6)까지는 자신이 속한 송광사에서 여러 차례 도편수로 일했다. 이에 앞서 1812년(순조 12)의 흥국사 심검당 중건 공사와 1828년(순조 28)의 선암사 대웅전과 승당 중창 공사 등에서도 도편수로 활동했다. 인근 지역의 사찰들을 오가며 공역을 펼쳤던 지역의 대표적인 승인 공장으로서 조영기문에 기록된 활동기간만 해도 무려 43년에 달했다.

이처럼 장기간 원근의 사찰들은 물론이고 지역 관아 건축의 공사를 오가며 도대목이나 도편수로 일했던 승려들은 누구보다 기술이 뛰어난 전업적 공장들이었다. 특히,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승인 공장들은 사찰과 관아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공역 책임자의 위치에서 민간 공장들을 지휘할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다. 『비변사등록』 영조 4년의 기사에서 “삼남의 사찰에 백여 칸의 법당이 라도 능히 일시에 지어낼 수 있는 부역 가능한 건축공장이 많다.”고 했을 정도로 조정에서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다. 1789년(정조 13)의 사도세자의 현륭원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창건할 때 멀리 떨어진 장흥 천관사의 문언이나 영천 은해사의 쾌성 같은 승려들이 특별히 차출되고, 1796년(정조 20) 화성 축조 때에 송광사의 궤행과 철은이 차출된 것도 기술이 뛰어난 공장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는 사찰 건물들은 대부분 이러한 승인 공장들 손으로 지어졌다. 소속 사찰과 말사를 오가며, 또는 지방 관아 건축에서까지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공역 활동은 특정 지역의 고유한 건축 유형이나 법식을 낳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찰과 관아를 오가며, 또는 지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역 활동을 펼침으로써 불교 건축과 관영 건축, 지역과 지역 간의 기술적 교류가 이뤄지고, 지역 고유의 건축 유형이나 법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고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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