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9. 회통불교시대의 산지가람
  • 자연에서 구현되는 회통불교이념
서치상

조선 후기의 불교 교단을 일컫는 말로 산중승단이란 산간의 사찰들마다 뚜렷한 종파도 없이 다양한 신앙형태를 아우르는 회통불교로 존속한 데서 비롯된다. 앞서 여러 종파들은 세종 때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된 후 연산군 때 모두 폐지되었다가, 명종 때 다시 부활되지만 문정대비의 죽음과 함께 혁파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사찰들은 다양한 종파의 신앙형태와 함께 민간의 토속신앙까지 수용하는 형세였다. 종전까지 경전과 그것에 소의한 종파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미타신앙·미륵신앙·약사신앙·관음신앙·산신신앙·칠성신앙 등 다양한 신앙형태를 수용하는 불전들이 하나의 사찰 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다만, 임진왜란 때 선교도총섭으로서 선·교 양종의 총감독자로 임명되어 의승활동을 펼쳤던 휴정(1520∼1604)은 선종 가운데에서 교종을 해소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선과 교를 함께 닦되 참선을 통해서 견성할 것을 중시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승려 계보가 법맥상 으로는 대부분 휴정의 후예로 이어진 만큼 그의 이러한 종지가 산중승단의 행로를 결정하다시피 했다. 선을 위주로 교를 융합하는 이른바 선주교종 내지는 사교입선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당탑 간의 기하학적 비례나 엄정한 정형성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탑을 새로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 위치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주어진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데 치중했다.

천여 년이 넘게 존속하던 가람은 더 이상 일체 중생의 귀의처나 예배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이제 가람은 다양한 불, 보살상을 모신 불전 건물을 비롯해서 승려들의 거주공간인 요사채로 이뤄진 일종의 집이었다. 일체제도의 구심적 공간인 만다라(Mandala)에서 승려들의 생활공간, 즉 상가라마(Sangharama, 중원)로의 변화였다. 굳이 비교하면, 고딕 대성당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도심 한가운데서 위용을 자랑하던 재속 교회(secular church)가 아니라 금욕적인 수도회 계파들이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림 속에 세운 수도원 교회(monastic church)와 성격이 흡사했다.

회통불교의 가람에는 각종 경전의 부처와 여래, 보살을 함께 모셨다. 그러다보니 석가모니불을 비롯해서 미륵불·관음보살·지장보살·약사여래 등 다양한 불, 보살을 모신 불전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중에서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중정 상단의 중심에 서고, 불교 교리상의 상대적 위계와 자연지세에 따라 미륵전·명부전·지장전·영산전·약사전·관음전·팔상전과 같은 부불전들이 그 하단과 주변에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주불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장려하게 보이도록 꾸며졌다. 정면과 옆면 3칸으로 같은 칸수라도 기둥의 높이와 간격을 키워서 내부를 넓게 하여 많은 신도들을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화려한 다포식 공포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벽화와 단청으로 장려하 게 꾸며서 다른 불전들과 차별나게 했다. 더 큰 사찰에서는 2∼3개 이상의 주불전 공간들로 병립하기도 했다. 예컨대 통도사는 상·중·하의 각 노전에 별도의 독립적인 주불전 공간들이 있고, 화엄사도 대웅전과 각황전 일곽을 별도로 갖추었다. 금산사나 대흥사, 쌍계사 등도 대웅전과 미륵전 등이 별도의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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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양산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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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가람들은 저마다 사적기에 창건연대를 통일신라 전후로 소급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 보는 가람 건물들은 대부분 17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들이다. 어떻든 이러한 중창 가람의 입지와 배치에는 전래의 풍수지리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산간 오지라도 사찰들은 풍수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았다. 가람은 배후의 산록을 등지고 좌·우의 산록에서 흘러내리는 Y자형의 계류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람 일곽의 외곽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 해당하는 산록이 둘러 싼 데다 입수까지 갖춘 길지에 자리 잡았다. 때로는 가람의 초입에서 최상단까지 중심종축 상으로 점차 높아지는 지세를 선택한 탓에 가금씩 남쪽이 아닌 서쪽이나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서쪽을 좌향으로 삼은 송광사와 범어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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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배치도
범어사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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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가람은 폭이 좁은 경사대지에 자리 잡은 탓에 평탄지의 평지가람처럼 회랑으로 둘러싸인 엄정한 정형적 배치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충분한 넓이의 평탄지라 해도 회랑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세조 때 도성 내의 평탄지에 건립된 원각사가 좋은 예이다. 그 대신 대지의 경사를 따라서 적절한 위치마다 축대를 쌓아 몇 단의 계단식 공간들을 조성하고 수행체계나 불·보살상의 위계에 따라 각각의 기능을 담는 건물들을 앉혔다. 상, 하단의 고저차가 자연스럽게 공간의 위계를 이루기 때문에 점층적인 공간구성이 가능하다. 상단은 불단, 중단은 보살단, 하단은 신중단으로, 또는 같은 순서로 하근기(체중현), 중근기(구중현), 상근기(현중현)의 점층적인 수행단계별 공간을 구성하는 식이다. 산지가람의 불가피한 입지조건이 선을 위주로 교를 융합하는 회통불교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보다 적합했던 것이다.

가람 일곽의 초입에는 Y자형의 계류가 합쳐져 하나로 흐르면서 가람 안팎의 경계를 이룬다. 물은 세속의 때를 씻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스러운 세계의 초입에는 수공간을 두었다. 궁궐의 금천이나 바실리카식 교회의 아트리움에 설치된 세정분수도 이와 같은 성격이었다. 산지가람에서는 긴 경사 진입로와 그 사이에 삼문을 설치해서 히에로파니를 더욱 고양시킨다. 삼문은 또한 사찰 침탈을 일삼았던 사대부들을 각성시키는 장치이기도 했다. 일주문 앞에 하마비를 세우고, 천왕문 양 협칸에는 유생의 모습으로 새긴 인형들이 4명의 천왕 발에 깔려서 신음하는 모습 으로 만든 것이 그 예이다.

신성의 고양을 위한 일종의 은유나 상징이지만 그 속에는 억불정책하에 신음하던 불교계의 처지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든 이러한 건축 구성은 고딕 대성당의 하늘로 치솟는 첨탑과 포인티드 아치에 못지않은 히에로파니의 장치이겠지만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한 점에서 가치는 더 높다. 자연에 겸양하고 인공을 절제하는 조선시대 특유의 미의식이 산지가람에서 공간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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