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9. 회통불교시대의 산지가람
  • 불전의 장식화와 실용적 건축생산
서치상

건물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는 다포식 공포가 으뜸이었다. 그러나 궁궐 정전과 같이 극히 중요한 건물 외에는 다포를 잘 쓰지 않았다. 더구나 유학자들에게 검약과 절제가 최고 덕목이었다. 화공 이나 진채단청, 숙석 등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만, 불교가 사교이며 사찰은 유수지도가 모인 곳이었지만, 가람은 여전히 성스러운 공간이어야 했다. 다포식은 주심포식이나 익공식에 비하여 부처의 장엄을 표현하는 데 더없이 적절했다. 그래서 어려운 사찰 살림에도 불전만큼은 다포식으로 꾸몄다. 유학자들도 관아나 향교, 서원 건물에 간소한 익공식을 쓰면서도 화려한 다포식 불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포집은 화려한 만큼이나 높은 수준의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고 인력과 재료도 많이 든다. 그래서 주불전 건물은 다포식으로 꾸미고, 위계가 낮은 부불전이나 문루, 요사채 등에는 익공식을 주로 썼다. 이에 반해서 익공식은 간소하고 비용도 적게 드는 탓에 중요도가 낮은 부속건물 등에 즐겨썼다. 그 대신 익공을 운공형이나 다포식의 앙서형으로 만들고, 연화나 연봉·봉두 등을 화려하게 초각하기도 했다. 익공 뿌리도 더 많이 돌출시키고, 행공첨차와 외목도리를 두어서 2출목까지 만드는 등 얼핏보면 주심포식과 혼돈되기도 한다. 간소한 익공식의 부족한 장엄을 보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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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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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의 주불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마곡사·통도사·대흥사·화엄사·해인사와 같이 큰 사찰에서는 앞면 5칸, 옆면 3∼4칸으로 짓기도 하고, 금산사처럼 앞면 7칸, 옆면 4칸의 큰 규모도 있다. 어느 경우나 건물 내부는 후면 벽 체 쪽에 고주를 세워서 수미단 위에 불·보살상을 모시고, 그 위의 우물천장 일부를 높여서 7∼9출목의 다포로 짠 닫집을 만들었다. 수미단의 뒷벽에는 팔상도나 나한도 같은 탱화를 설치했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지 않는 우물반자를 설치했으므로 가려지는 천장 속 부재의 치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에 천장과 벽체의 장엄에 한껏 신경써서 반자틀이 교차하는 부분에는 연화문 등을 초각한 종다리를 달고, 반자널에는 다양한 불화를 그려 넣었다. 종전까지 지붕 가구부재를 잘 치목해서 그대로 드러나게 했던 것과 달리 대들보 위로 우물 천장을 짜고 거기에 단청이나 벽화로 장엄을 표현했다. 부재의 치목을 간소화하는 대신 눈에 드러나는 부분을 한껏 치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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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사 대웅전
운수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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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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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금송(禁松)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소나무를 나라의 허가없이 함부로 벌목해 쓸 수 없었다. 울창한 산림들은 국용목재를 위한 봉산(封山)으로 지정된 데다 사찰 본산 내에서 추녀나 대들보로 쓸 체대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재를 매입해 쓰는 일이 많아지고 공장이나 역군의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공기 단축과 공사비의 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맞배집에 다포식 공포를 쓰는 것이 고안된 것 같다. 맞배는 팔작에 비해서 맵시가 떨어지지만 추녀가 필요 없고, 공포는 전후에만 짜고 좌우에는 풍판으로 가리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물량과 공역이 절감되고 좁은 대지에 더 많은 건물을 지을 수도 있었다. 범어사의 건물들이 그 좋은 예이다. 대웅전과 일주문 등 거의 모든 건물들을 맞배로 만들었기 때문에 경사가 급하고 좁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을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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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만세루 내부 천장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만세루 내부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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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청양 장곡사 하대웅전
충청남도 청양 장곡사 하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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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 관룡사 대웅전 내부
경상남도 창녕 관룡사 대웅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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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 동국사
전라북도 군산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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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적 분위기에다 선종 위주의 형식타파적 태도는 가급적 치목이나 숙석을 절제하겠끔 했다. 목재의 원래 생김새를 살려서 자연미를 돋보이게 하거나 화려한 다포식 불전을 지으면서도 막돌 로 된 덤벙초석을 쓴 것이 그런 예들이다. 소나무를 적당히 치목해서 휜 부분을 위로 해서 대들보로 쓰고, 원래 생긴 그대로 기둥이나 서까래로 사용한 경우도 많다. 선운사 만세루는 이러한 무작위와 무기교의 미의식이 발현된 대표적인 예이다. 이 밖에도 자연지물을 살려서 지붕 한쪽은 팔작지붕을, 다른 쪽에는 맞배지붕을 올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조악하고 치기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가나 유가를 막론하고 졸(拙)과 박(樸)의 미의식이 통념이었던 시절의 눈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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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일주문 앞 양쪽에 있는 일본식 표석
통도사 일주문 앞 양쪽에 있는 일본식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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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호개방이 이뤄지면서 마침내 불교계는 오랜 억불정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계는 해방을 맞이했다. 1895년(고종 32) 4월 식민지 침탈을 목적으로 조선에 진출했던 일본 불교 일련종승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요청으로 김홍집 내각이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한 것이다. 그러나 1911년에 반포된 ‘사찰령’에 따라 불교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 당하였다. 이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1876년부터 주요 개항지와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처에 일본 불교 사찰들이 수 없이 건립되었다. 일본불교 사찰들과 결맹을 맺은 사찰들이 적지 않았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대본산 주지들이 친일승려들로 채워졌다. 그런 영향으로 사찰의 모습이 일본 사찰을 흉내내서 일본풍으로 변개된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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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침투한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동본원사 부산 별원
최초로 침투한 일본 정토진종 대곡파동본원사 부산 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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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서울 남산(장충단)에 있던 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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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부산 개항 이래 한반도에 침투한 일본 불교 종파 중에서 정토종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어려운 경전연구나 선지참구가 아닌 단순한 염불 위주의 이 종파는 대한제국 황실과 고위 관료들에 밀착해서 염불회를 성행시켰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른 바 천황의 만수무강과 일본 황군의 위무를 위한 염불회가 성행해서 사찰마다 기존 건물을 염불당으로 바꾸거나 새로 염불당을 짓는 일이 많았다. 일본 불교를 따라 대처식육(帶妻食肉)이 일반화됨으로써 사찰마다 대방 (大方)이나 요사가 건립되어 승려들의 살림집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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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3층 석탑(통일신라 말)
범어사 3층 석탑(통일신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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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사찰들에서는 대도시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사찰 내에 사립학교를 짓는 등 불교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펼쳤다. 비록 일본 불교의 영향에 의해서였지만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가람 일곽 내에 여관이 들어서는 등 일본인들의 위락지로 변해 간 경우도 있었다. 사찰 운영이 조선 총독의 손에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때로는 일본 불교를 흉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1920∼1930년대에 많은 사찰들이 전례 없이 추진했던 석물 공사이다. 오랜 동안 숙석을 금기시하던 관행에서 벗어나서 불전 기단이나 계단·석축·석등·석교 등을 잘 다듬은 돌로 새로 축조한 일은 불교 해방의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신식으로 축조’란 명분을 가진 만큼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본풍과 신식을 동일시해서 이를 모방했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의 지원금으로 추진된 탓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도 문화재급 석탑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예전에 없던 석제 난간을 만들고, 곳곳에 조선총독부나 일본 연호를 새긴 표석을 설치했다. 일 제강점기의 수많은 사찰 조영 때에 단청 공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과 달리 단청이 없는 일본식 건물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 하에서 많은 수의 일본 사찰들이 불교계가 아닌 민간과 기독교계에 불하되어 철거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서 불교계에는 일부만이 불하되었다. 그 중에는 군산 동국사와 같이 일본 사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 사찰로 개조되었다. 이후 1960년대의 불교정화운동에 의해서 한국불교에 씌워진 일제잔재는 대부분 청산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서 오늘에 이른다. 다만, 앞서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일본풍으로 축조된 일부 구조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를 일제잔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아픈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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