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
  • 01.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와 유교건축
김지민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孔子, B.C. 552∼479)가 주장한 유학(儒學)을 받드는 종교로 주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경전으로 하고 있다. 삼국이 불교의 전래로 인해 사회 전반에 크나큰 변혁을 겪었듯이 조선은 유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유교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다. 유학은 동양 여러 나라의 정치·사회·제도·문화 등 각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중국 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어 고찰 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 시대에 들어온 한나라 시대의 5경사상(五經思想)이요, 둘째는 통일신라·고려 전기에 들어온 수(隋)나라·당(唐)나라 시대의 문화적 유학 사상이다. 셋째는 고려 말엽·조선 초기에 들어온 주자(朱子) 사상인데, 이는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을 대표한 것으로 근세 한국 학술 문화 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하겠다. 넷째로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청대(淸代)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이다.82)류승국, 『한국의 유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 pp.16∼17. 이 중 3기에 해당하는 성리학의 도입은 조선 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큰 역할을 했다.

신유교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은 12세기에 송나라 주희(1130∼1200)가 창설한 새로운 학파로 유교에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유교를 심성수양의 도리로 확립한 새로운 학풍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정도전과 같은 조선의 신흥 사대부 계층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결국 새 시대를 여는 국시가 됐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래한 사람은 안향(1243∼1306)으로 그는 후일 한국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에 주향으로 봉안된다.

1392년 조선왕조를 새로 세운 이성계(1335∼1408)는 2년 후인 1394년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는 등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농본정책 등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시책도 펼쳤지만 무엇보다도 새 왕조에 걸맞는 국가이념이 필요했다. 즉, 고려의 지지기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의 강화를 위한 사상적 전환이 요구됐는데 그것이 바로 유교이다. 이로써 유교는 조선 500년의 지배적 문화가 됐다.

태조가 유교이념 보급과 정착을 위해 국가정책으로 삼은 것 중 하나는 바로 ‘흥학(興學)’이다. 즉, 학교 교육을 진흥시켜 유교 중심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전국적인 교육제도가 마련되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한양의 성균관(成均館)과 5부학당(五部學堂), 그리고 지방의 향교(鄕校)였다. 이러한 관학은 조선 초 지방의 작은 고을에 까지 유교문화를 보급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 초에는 아직까지 나라가 유·불교체기였고 관학과 한양 중심의 유교문화가 자리했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혈통을 중요시 하는 토착적 가치관에 성리학적 유교문화의 성격이 나타나면서 지방에 사족 중심의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촌락에는 반드시 종가와 함께 가묘(家廟)가 설치되어 촌락 형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향촌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재야에 있던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등장하여 기존 세력과 갈등을 갖기도 하고 다시 낙향, 재기를 꿈꾸며 성리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고향에 은신처 격인 학당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사(精舍)·서당·정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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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
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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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마지막 창건인 충청남도 오천향교(1905)
조선조 마지막 창건인 충청남도 오천향교(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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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이 무렵에는 송나라 주희에 대한 숭배열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따라서 학업공간을 마련하는 데에도 주자가 세운 백록동(白鹿洞) 서원이나 무이정사(武夷精舍) 같은 것을 본보기로 하여 풍광이 뛰어나고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황의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이이의 은병정사이며 이들은 후일에 도산서원과 소현서원이 된다. 즉, 16세기 중엽부터 우리나라에도 서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와서는 성리학이 점차 사상적 학문으로 활력을 잃고 대신 생활문화로 더욱 뿌리를 내리게 된다. 서원의 기능도 제향우위로 변하고 오히려 향촌에 사우가 더 많이 건립되어 문중중심의 향촌사회로 발달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재각(齋閣)과 정려(旌閭) 건립도 일반화 됐다. 종묘 창건 이후 충청남도의 오천(鰲川)향교 건립(1905)년을 마지막으로 관제성격의 조선 유교건축은 그 막을 내린다. 나라가 어수선하였던 시기, 그리고 국가의 지원도 없이 지방유림 자체로 건립을 본 오천향교는 우리에게 조선 유교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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