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
  • 03. 종류별 유교건축
  • 향교
  • 3. 건축 규모 및 양식
김지민

향교건축의 조형미는 단적으로 말해 절제된 단순미에 있다. 유교의 이념 가운데 절약과 검소는 ‘예(禮)’의 기준이 되어 사회의 윤리규범을 정립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축적인 면에서도 화려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규모가 증대되지는 않았다. 즉, 소박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으로 조선시대를 지켜왔다. 의장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상징이나 장식적인 요소는 모두 배제되었다. 잡상이나 용두 등도 볼 수 없고 공포의 구성도 익공식이 절대적인 유형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 후기에 사찰건축의 본전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다포양식과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명륜당의 경우는 더 단출하게 민도리양식이 상당수의 향교에서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통일적인 요소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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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향교 대성전
강원도 강릉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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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대정향교 대성전
제주도 대정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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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향교 명륜당
전라북도 김제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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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향교 명륜당
부산 동래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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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의 건축 규모는 당시의 신위봉안, 즉 설위(設位)의 내용과 제향의식의 공간적 측면을 고려하여 정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성균관의 대성전은 5칸이며 전면에 2개의 계단을 두었고, 주와 부의 대성전은 3칸으로 역시 남향이다.”라고 되어 있어, 어느 정도 건축적 규범이 제시된 듯하나 현존하는 건물들을 살펴보면 당시 고을의 크기나 설위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상당수의 향교가 임진 왜란 때 소실되어 이건, 중건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가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교육 기능은 약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제향의식이 준종교적, 신앙적 차원으로 인식되어 비록 작은 고을의 향교라도 곳에 따라서는 앞면 5칸으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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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향교 서무
충청북도 괴산향교 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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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향교 서재
전라남도 고흥향교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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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무는 대부분 3칸 규모로 작게, 그리고 민도리식으로 건립되었다. 문묘에서 대성전과 동·서무는 명칭상부터 ‘전(殿)’과 ‘무(廡)’로 하여 현격한 인식차를 갖게 하였다. 즉, 공자를 비롯해 사성을 모신 건물은 ‘전’으로 명명하여 대궐과 같은 위계를 갖게 하였 고, 반면에 우리나라 18현 및 중국의 하위 선현을 모신 건물은 ‘무’라고 하여 행랑의 정도로 격하시켰다. 한편, 예외적으로 대설위(大設位)였던 전주·경주·상주향교 등은 9칸에서 10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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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향교 누각
경상북도 영천향교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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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의 규모는 당시 고을의 크기와 교생 수 등이 규모 결정에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물들은 사실상 교육적 기능이 많이 상실했던 조선 후기에 새로 중건되거나 중수 사실이 많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으로 당시 명륜당의 건축규모를 추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현존하는 명륜당의 규모는 당시 고을의 크기에 관계없이 보통 앞면 5칸, 옆면 2칸 정도가 제일 많이 보인다.

동·서재는 교생들의 기숙처였던 관계로 교생수에 따라 건축규모가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시대 90명의 정원이었던 나주향교는 11칸으로 규모가 매우 크다. 그러나 대부분의 향교는 현재 3칸이나 4칸 정도의 규모가 일반적인 모습이다. 평면형식은 주로 앞쪽에 퇴를 두어 민가와 같이 툇마루를 설치하고 그 안쪽으로는 온돌방을 두었다.

<표> 향교 교생 정원(성종)
관부 정원
부·대도호부·목 90
도호부 70
50
30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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