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
  • 03. 종류별 유교건축
  • 서원
  • 2. 입지 및 건물배치
김지민

서원이 들어선 곳은 대체적으로 읍치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다. 즉, 산기슭이나 계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한적한 곳이다. 이러한 곳을 택한 이유는 학문 연구가 곧 수양이고 수양처로는 번화한 환경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6세기 사림정치의 현장인 은둔사상도 서원의 입지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환경을 개념과 함께 구체적으로 언급한 이는 퇴계 이황(1501∼1570)이다. 그는 일찍이 성균관 유생(23세), 대사성(41세)을 거치면서 성균관의 총체적 교육 부실을 경험했고, 또한 단양(38세)과 풍기(39세) 군수를 지내면서도 향교가 지방교육의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국학 대신 새로운 교육공간으로서의 서원을 주시했고, 제도와 함께 공간의 장소성도 매우 중요한 선택의 하나로 여겼다. 그의 구체적인 서원 입지에 대하여는 풍기군수 재임 시절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한 글인 「상심방백서(上心方白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을 강명하고 업을 익히는 무리는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합니다. 많은 책을 싸 짊어지고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고용한 중에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그 덕을 쌓고 인을 익혀 이것으로 낙을 삼습니다. 그 때문에 서원에 나아가기를 즐기는 것입니다. 국학이나 향교는 중앙 또는 지방의 도시 성곽 안에 있으며 학령에 구애됨이 많습니다. 한편으로 번화한 환경에 유혹되어 뜻을 바꾸게 하여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본다면 어찌 그 공효를 서원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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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배치도
병산서원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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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대청마루)에서 본 병산서원
강당(대청마루)에서 본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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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이산서원(伊山書院) 기문(1559)에서도 서원이 읍치와 6∼7리 떨어져 있어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음을 피력했고, 역동서원(易東書院) 기문에서도 서원 자리가 아늑하고 한적한 매우 좋은 형국임을 강조했다.

병산서원·도동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 등은 수려한 산과 함께 계류와 강을 끼고 있는 경사지 서원의 대표적 예이다. 한편, 충청도와 전라도 서원은 주로 평지형 서원으로 발달했다. 즉, 낮은 구릉성 산지를 배경으로, 또는 넓은 들녘에 입지하여 경상도 서원과 위치에서 차이를 보인다(돈암·노강·무성·필암서원 등).

서원은 대개 사당에 봉안된 주향자의 향리에 많이 건립됐다. 즉, 후학과 유림들이 자기 향리 출신 중에서 덕망이 있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내세워 서원을 세웠다. 한편, 고향이 아니더라도 유배지(김광필, 순천 옥천서원), 관직(송준길, 상주 흥암서원), 묘소(조광조, 용인 심곡서원) 등 연고로 인해 서원이 건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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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 경내의 도산서당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 경내의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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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향자가 생전에 운영하던 서당이나 정사 자리가 후일 서원이 되기도 했다. 즉, 후학들이 선생의 뜻을 받들어 서원을 세운 것으로 서원 설립의 개념과 일치하는 매우 이상적인 자리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안동 도산서원인데, 이 서원에는 퇴계 이황이 1560년에 건립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1561)가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까지 학문처로 삼은 곳으로 퇴계의 자연관과 건축관 그리고 학문적 이상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곳이다.

서원은 사묘와 서재의 기능이 하나가 된 것이기 때문에 서원 경내는 그러한 기능에 맞추어 사당이 있는 제향 구역과 강당과 재실을 갖춘 강학 구역으로 크게 양분화되어 있다. 이 두 구역이 서원건축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부차적으로 지원 구역과 진입 구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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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건축의 영역구성 사례(도동서원)
서원건축의 영역구성 사례(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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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 옥산서원 강학 구역
경상북도 경주 옥산서원 강학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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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도동서원 강학 구역
대구 달성 도동서원 강학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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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 덕봉서원 제향 구역
경기 안성 덕봉서원 제향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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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역의 배치구도는 입지한 지형이나 건립시기, 기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전면에 강학 구역을 두고 후면에 제향 구역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일관되어 항상 묘 구역이 뒤편에 위치한다. 관학인 향교가 오히려 서원보다 다양한 유형의 영역설정(전묘후학·전학후묘·좌묘우학·좌학후묘 등)을 보인다. 입지환경이나 설립자의 성향, 그리고 사학이라는 여러 여건으로 본다면 오히려 향교보다 더 다양한 배치유형이 있었을 것인 데, 그러하지 못했다. 격식보다는 오로지 서원을 학문의 장으로만 여겨 건축형식이 한정적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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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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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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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건축 구성은 사림이 성장하여 순수한 도학서원으로 건립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 무렵에 지어진 것들이다.

한편, 한국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정형적인 건축구성이 보이지 않는, 즉 서원 경내 전체가 교육공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 배치가 매우 분산적이다. 또한, 제향 구역은 횡축 한쪽 편에 치우쳐 있다. 현존하는 초기의 서원이 이 서원뿐이어서 당시 건축 유형을 단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

17∼18세기 서원제도의 혼란은 결국 건축에도 변화를 야기하였다. 강학보다는 향사 위주로 서원이 운영되어 점차 제향 구역이 넓어지고 상대적으로 강학 구역이 줄어들었다. 장판각 같은 건물은 물론 심지어는 재실마저도 건립되지 않았다. 결국 본래의 서원건축은 사라지고 사우 성격의 건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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