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
  • 03. 종류별 유교건축
  • 서원
  • 3. 건축 규모 및 양식
김지민

서원 설립의 일차적 목표는 교학이었으므로 강당과 동·서재 등의 교학시설이 서원 내에서 건축적으로 완성도가 제일 높다. 이는 문묘 쪽에 건축적 비중을 더 둔, 즉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한 단계 높은 건축적 양식을 갖는 향교건축과 대비된다.

강당은 강학을 위해 마련된 현실적인 서원 내의 핵심 시설로, 서 원 내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건축적으로 우수한 편이다. 칸 수로 보면 대부분의 서원이 보통 앞면 5칸 정도로 되어 있다. 이 경우 중앙으로는 대청을 3칸 규모로 넓게 꾸미고 그 양 옆으로는 온돌방을 2개 둔다. 대청은 강회 때 사용되고 온돌방 2개 중 하나는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로, 다른 하나는 현재의 교무실과 같은 기능의 실로 사용된다. 즉, 건물의 용도가 복합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향교의 명륜당과 함께 강당 건축의 규범으로 등장한다. 한편, 의도적인 계획인지 5칸이 아닌 4칸으로 그 규모가 축소된 서원도 일부 있다(남계서원, 도산서원 등).

건축양식은 민도리 내지는 익공식으로 매우 간결하고 소박하다. 당시 서원의 우상으로 본다면 사찰의 법당 못지않게 화려하고 권위적으로 강당을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서원 건축이 종교성, 권위성과는 먼 오로지 학문의 장으로서 검소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외적으로 도동서원과 돈암서원 등은 주심포 양식으로 다소 화려하고 장식적인 요소가 있다. 이들은 유교건축에서 몇 안 되는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에서 정한 고유 명칭이 있다. 즉, 건물 중앙의 처마밑에 ‘∼당’이란 어미의 현판이 걸려 있다. 도동서원은 중정당(中正堂), 옥산서원은 구인당(求人堂), 병산서원은 입교당(立敎堂), 남계서원은 명성당(明星堂), 필암서원은 청절당(淸節堂), 심곡서원은 일소당(日昭堂), 덕봉서원은 정의당(正義堂) 등이다. 당시의 모든 인간된 도리와 학문적 성취를 추구하는 상징적 당호다. 이는 관학인 향교가 모두 명륜당으로 통일된 것과는 크게 비교가 된다.

재실은 강당에서의 강회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시 머물며 공부하는 반 교사적 성격의 건물이다. 퇴계가 지은 이산서원(伊山書院) 원규를 보면 이 건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유생들은 항시 방에 머물며 독서에 정념하고 다른 방의 출입은 가급적 삼가도록 되어 있다. 서원 원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10인 정도로 한정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면서 문란의 정도가 꽤 심각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한때 사액서원 20인, 미사액서원 15인으로 법제화하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잘 지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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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 노강서원 사당
충청남도 논산 노강서원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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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 누각(만대루)
경상북도 안동 병산서원 누각(만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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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 필암서원 누각(확연루)
전라남도 장성 필암서원 누각(확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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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재는 강당에 비해 건축 규모가 상당히 작다. 보통 앞면 3∼4칸 규모로 방 2∼3개에 작은 대청 하나가 드려지고 앞쪽으로는 보통 툇마루가 놓인다. 마치 작은 살림집 같이 꾸며졌다. 원생 수를 감안하면 다소 공간이 협소한 느낌이 드나 모든 원생이 재에 기거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소 융통성 있게 공간을 활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건축 양식은 방주를 사용한 민도리집 구조이며 지붕 또한 대부분 간결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동·서재 역시 각 서원마다 고유의 명칭을 붙인 현판을 건다. 강당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함이다. 그 예로 도동서원의 경우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 도산서원은 박약재(博約齋)·홍의재(弘毅齋), 필암서원은 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 옥산서원은 민구재(敏求齋)·암수재(闇修齋)이다.

장판각은 일종의 교육지원 시설로서 서적 및 목판의 간행, 수집, 보관 등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건축 규모는 보통 앞면 3칸으로 되어 있고 양식은 간단한 민도리식 구조의 맞배집이다. 벽체는 4면 모두 판벽으로 되어 있고 상인방 위로는 통풍을 위한 살창을 내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이 모든 구조가 습기 방지를 위한 배려다.

누각은 보통 벽체없이 기둥이 모두 드러나는 완전 개방된 건축으로 주변 자연과 연계성이 깊은 흥미로운 건축이다. 누각은 관학인 향교보다는 서원에서, 지역적으로는 영남지방에서 더 발달했다.

누각의 규모는 보통 앞면 3칸의 2층으로서 강학 구역 앞에 단촐하게 자리한다. 그러나 병산서원과 옥산서원 누각은 무려 7칸으로 그 규모가 매우 크다. 두 서원의 누각은 규모도 규모이지만 독특한 건축구성으로 서로 다른 서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가령 병산서원 만대루는 강학마당을 바깥 자연세계와 개방적으로 연결시키려고 유도했고, 반면에 옥산서원 무변루는 반대로 폐쇄적인 역할 을 하고 있다. 대개 강학마당은 네모 형태로 엄숙하고 경직되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만대루(벽체 없이 1, 2층 모두 기둥을 처리)는 이를 외부와 연결시켰고, 무변루(중앙 3칸만 대청으로 하고 그 좌우로 온돌방, 누를 설치)는 강학 구역을 더욱 경직되게 하였다. 한편, 필암서원 확연루(앞면 3칸, 옆면 3칸)는 2층 사면 모두에 판장문을 설치하여 다른 서원과 구별이 된다.

사당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규모는 보통 앞면 3칸, 옆면 2∼3칸 정도로 크지 않다. 이는 서원 창건 당시 모시는 신위가 1인이었으므로 그에 걸맞게 건축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후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추가로 보통 2∼3인을 더 배향하는 서원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규모가 커지거나 증축 등은 하지 않았다.

건축양식은 익공식이 주류를 이루고 주심포식은 도동서원 등 극히 제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유교의 검소함가 절제된 사고를 후학들이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지붕은 향교의 대성전과 같이 대부분 간결한 맞배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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