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삼국시대
  • 1. 고구려(기원전 37년∼기원후 668년)
  • 고구려 전기(기원전 37년∼기원후 427년): 국내성과 환도산성
이강근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는 통구 지역이었다. 일시적으로 도읍을 옮긴 적이 여러 번 있으나 대부분의 기간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다. 압록강 이북 통구하(通溝河) 주변 평야에 국내성을 쌓고 그 안에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거처만을 마련하였다. 전시(戰時)에는 주변의 북쪽 고지(高地)에 쌓은 산성인 환도성으로 왕이 피신하였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환도성은 환도산 위에 쌓은 산성(山城)으로서 산성자산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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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 전경
환도산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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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은 현재 중국 정부의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으나, 성 안팎에 5∼6층 아파트가 가득 들어 차 있는 등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아파트 건립 당시 땅속에서 드러난 건물터라든지 발견된 매장문화재 등에 대해서는 공식적 보고서가 나와 있지 않아 그 실상을 알기 어렵다. 다만, 최근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사업’으로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서 국내성터 일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성 안 서북쪽에서 주춧돌과 붉은 색의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나와서 고구려 당시에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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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서벽
국내성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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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북벽
국내성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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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 서남곽 바깥 벽과 치
국내성 서남곽 바깥 벽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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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의 큰 길로는 성문들을 서로 연결하는 남북의 두 길과 동서의 두 길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 문터는 동·서·남벽에 각각 하나씩만 남아 있으며 북벽에는 원래 문이 있었던 것을 뒤에 성벽을 다시 쌓을 때 막아버린 흔적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위치는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동문은 남쪽으로 남문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의 4모서리에는 각루 터가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雉)도 설치 하였는데 현재 동벽에 3개, 서벽에 1개, 북벽에 1개 등 모두 7개가 남아 있으며 이는 궁성에 치를 설치한 최초의 예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방추형 돌로 네모나게 쌓았는데 성벽 둘레는 2,800여m이며 서, 남, 북벽이 각각 700여m, 동벽은 600여m이다. 성 바깥벽의 높이는 대체로 5∼6m, 성 안벽의 높이는 3∼5m이고, 밑 부분 폭은 10m이다. 성벽 밖에는 벽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폭 10여m의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를 설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통구하를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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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 발굴 현장
환도산성 발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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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동북공정사업의 하나로 환도산성 내 궁전터가 발굴되었다. 2001년부터 2003년 사이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와 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의 주도로 환도산성내 궁전지 조사가 시행되었다. 보고서에서는 궁전 터에 대한 발굴결과를 정리하면서 ① 층위퇴적 및 성인(成因), ② 궁전지의 기본 포국(布局), ③ 궁전지의 건축 결구(結構)와 형제(形制) 등 3개항으로 나누어 유적 발굴 현황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90)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丸都山城-2001∼2003年 集安 丸都山城調査試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pp.64∼86에서는 궁전지 유구에 대하여, pp.86∼153에서는 출토된 유물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남서향으로 경사진 대지에 4단으로 형성된 터 위에는 모두 11채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 데, 각 단은 동서방향으로 길게 직사각형으로 높이 차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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