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삼국시대
  • 1. 고구려(기원전 37년∼기원후 668년)
  • 고구려 중기(427년∼586년): 안학궁과 대성산성
이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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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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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평면도
안학궁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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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성기인 장수왕(재위 413∼491)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때에 수도를 건설한 곳은 지금의 대성산 일대였다. 국내성에 비하여 주변에 강력한 군사 시설들(대성산성·청암리토성·고방산토성 등)을 함께 갖추고 있어서 옹성이나 치 같은 방어용 시설물은 성벽에 설치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이곳을 발판으로 삼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대성산성(大城山城)은 주위가 20리가 넘는 고구려 최대 산성이며 안학궁(安鶴宮)은 둘레 2.4㎞인 방형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왕을 비롯한 통치 집단의 정사(政事)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건물과 시설물만을 갖추었고 일반 백성들은 성 밖에서 살았으므로 궁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성산성은 둘레 7,076m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묘향산 줄기의 지맥이 대동강 북안에 이르러 끝나는 높이 274m 고지를 중심으로 6개의 산봉우리를 성벽으로 둘러막았다. 안학궁성은 이 대성산성의 소문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북쪽으로 대성산, 앞으로 대성벌, 동쪽으로 장수천, 서쪽으로 합장강, 남쪽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성벽 한 변의 길이는 622m, 넓이 약 38만㎡나 되는 웅장한 토성으로 남벽과 북벽은 정동서향이지만 동벽과 서벽이 3.5도 가량 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성의 형태는 마름모꼴에 가깝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되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바깥 면을 조금씩 뒤로 밀면서 계단식으로 경사지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현존 높이는 4m이나 원래 높이는 5m쯤 되었던 것 같다. 문은 동, 서, 북 3벽에 각각 하나씩 냈고, 남벽에는 3개를 냈는데 가운데 문은 가장 커서 궁성 정문이었을 것이다. 성벽 네 모서리에는 각루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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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궁 남궁 모습과 대성산성 성벽(디지털 복원)
안학궁 남궁 모습과 대성산성 성벽(디지털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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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에는 성벽을 따라 약 2m 너비로 포장한 순환 도로를 냈다. 또 성문들을 연결한 도로, 궁전과 회랑, 못, 조산 등 규모가 크고 화려한 건물과 시설물이 있었다. 해자는 따로 파지 않고 남북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세 물줄기의 가운데 물줄기는 성의 북벽을 뚫고 성안 동쪽의 낮은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호수의 수원(水源)으로 이용되었다. 물줄기가 뚫고 지나간 성벽에는 수구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있다. 궁전의 배치를 보면 남북 중심선 위에 남궁·중궁·북궁을 배치하여 중심축을 형성하고 그 동쪽과 서쪽에 동궁과 서궁을 통하는 보조축을 대칭으로 설치하였다. 서궁과 동궁은 그 역할을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예에 비추어 동궁은 태자궁으로 짐작된다. 배치의 특징은 남궁에서 북궁으로 가면서 터는 높아지고 건물은 낮아졌으며 각 궁 남회랑의 길이가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줄어들게 하였다. 건물의 크기는 1호 궁전터의 경우 앞면 87m, 옆면 27m로 우리나라 최대의 규모이다.91)경복궁 근정전 앞면은 30.14m, 황룡사 중금당 앞면 49m, 발해 상경 용천부 제1절터 금당 앞면 50.66m이다.

통구 시대의 국내성과 위나암성, 평양 시대의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은 평성과 산성을 함께 갖춘 고구려식 수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곧, 궁성의 뒤에는 유사시에 의지하여 싸우는 산성이 있거나 그와 직접 연결된 험한 산줄기들이 가로막혀 있고 큰 강을 낀 벌판에 수도의 터전을 잡았다. 군사적 목적에서 건설된 산성과 통치 집단이 거주하는 궁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병존하였다.

국내성과 안학궁성은 모두 네모난 성벽을 쌓고 사방에 문을 냈으며 대칭되는 위치에 성문을 세웠다. 그런데 이들 두 궁성은 아직 도성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한 국가의 수도에 쌓은 성이라는 의미에서는 물론 도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때에는 궁성만을 성벽으로 둘러쌌을 뿐 수도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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