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삼국시대
  • 1. 고구려(기원전 37년∼기원후 668년)
  • 고구려 후기(586년∼668년): 평양 궁궐과 장안성
이강근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평양 초기의 수도는 160년만인 586년(평원왕 28)에 다시 대동강 유역의 장안성으로 옮겨진다. 장안성은 552년(양원왕 8)에 쌓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34년이 지난 586년에 완공된 듯하다. 장안성은 도시 주민들을 모두 성 안에서 살 수 있게 크게 쌓은 것으로 평지성과 산성의 특성을 모두 구비한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새롭게 축조되었다. 북성·내성·중성·외성 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둘레가 23㎞, 성 안 총면적이 1,185만㎡에 이르는 큰 성이다. 평지와 산의 유리한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여 쌓았는데 북쪽은 금수산의 최고봉인 최승대와 청류벽의 절벽을 뒤로 하고 그 동·서·남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았다. 이처럼 장안성의 지세는 산과 벌을 끼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보면 뒤에 산을 지고 있는 평지성 같지만, 북쪽이나 서북쪽에서 보면 모란봉과 만수대, 창광산, 안산 등을 연결한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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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내성 연광정
평양성 내성 연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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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으로 남산재를 지나 만수대 서북 끝까지에는 내성벽을, 그 북쪽에는 모란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연결하여 북성을 쌓았으며 내성 남쪽으로는 오늘의 대동교에서 안산까지를 가로막은 중성벽을 쌓았다. 그 남쪽에는 대동강과 보통강 기슭을 둘러막아 외성을 쌓았다. 가운데 내성에는 왕궁, 중성에는 통치 기관, 외성에는 시민들의 거처를 두도록 구획되었으며, 북성은 장안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모란봉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내성에 덧붙여 겹으로 쌓았다.

평양성 성벽에서 발견된 성돌에 의하면 내성과 북성은 566년에 외성과 중성은 569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성 밖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천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는 반면, 만수대 서남단에서 칠성문을 지나 을밀대와 모란봉에 이르는 구간만은 성벽 안팎에 해자를 팠다. 안쪽에는 성 벽 밑에서 약 3m 안쪽에 10m 너비로 해자를 팠고, 밖으로는 약 20∼30m 떨어진 경사면에 5m 너비로 구덩이를 팠다. 성문은 여러 곳에 있었을 테지만 현재까지 성문터로 알려진 곳은 4곳이다. 중성의 서문에 해당하는 보통문의 여러 주춧돌 가운데 일부는 고구려 때의 것이며, 중성 남문에 해당하는 정양문 부근에 드러나 있는 주춧돌 2개 역시 고구려시대 것이므로 이곳에 고구려 때에도 성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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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글자새김 성돌(경상동 출토)
평양성 글자새김 성돌(경상동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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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에는 자갈로 포장한 도로가 있었는데 도로 사이에는 규칙적으로 배치된 이방(里坊)들이 있었다. 도로에는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으며 큰 길 사이에 좁은 길을 내어 4개의 이방이 단위를 이루면서 전(田)자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田’ 모양의 이방제도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에서도 공통적으로 썼으며, 나아가서 일본의 헤이죠쿄오(平城京)와 헤이안쿄오(平安京)에서도 8세기 이후에 이 제도를 썼다.

한편, 장안성에서는 글자를 새긴 고구려 성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경상동에서는 특히 ‘丙戌十二月□漢城下後□小兄文達節自此西北涉之’라고 새긴 성돌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도읍은 통구에서 평양 대성산 일대로 다시 평양 장안성 일대로 옮기면서 국가의 발 전에 상응하는 도성과 궁성을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에 평성과 산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도성을 갖추던 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둘을 결합한 평산성을 쌓고 그 안에 이방체재를 갖춘 도시를 형성하여 백성들도 도성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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