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남·북국시대
  • 1. 통일신라
  •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
이강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0)은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함으로써 얻게 된 막대한 재물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주를 통일 왕조의 수도답게 변모시키려 하였다.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궁궐을 장려하게 수리하는 한편, 새로운 궁궐로서 동궁(東宮)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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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임해전지)
안압지(임해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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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4년 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하여, 이로부터 5년 뒤인 19년 2월에는 궁궐을 매우 웅장하고 장려하게 중수하였으며, 같 은 해 8월에는 동궁을 창조하고 궁궐 안팎 여러 문에 써서 걸어 놓을 이름을 처음으로 정하였다. 이 기록 가운데 못은 월지(月池), 중수한 궁궐은 월성의 정궁, 창조된 동궁은 월지를 포함한 주변 건물터 전체인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월지라고 불렸는데 조선 초기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압지는 천주사(天柱寺) 북쪽에 있으며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巫山十二峯)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그 서쪽에는 임해전(臨海殿)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춧돌과 계단만이 밭이랑 사이에 남아 있다.”라고 기록된 이후 최근까지 안압지로 불려 왔다.

1974년에 경주종합개발계획의 한 부분으로 주변 건물터를 정리하던 중 못에서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정리 작업을 중단하고, 1975년 3월 24일부터 1976년 12월 30일까지 2년에 걸쳐 문화재연구소에서 연못 안과 주변 건물터를 발굴한 결과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발굴 조사로 못의 전체 면적이 15,658㎡(4,738평), 3개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가 1,285m로 밝혀졌다. 유물은 기와와 전돌 24,000여 점을 포함하여 3만 점이 출토되었고 연못의 서쪽과 남쪽에서 건물터 26곳, 담장터 8곳, 배수로 시설 2곳, 입수구 1곳이 발굴되었다. 이 발굴 조사를 토대로 1980년에 연못 서쪽 호안에 있는 3개 건물터에 건물을 복원하였으며, 밝혀진 건물터의 초석들을 복원하여 노출시키고 주변의 무산 12봉을 복원하여 옛 모습은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월지 주변에서 많은 건물터가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어느 것이 임해전 터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이 697년(효소왕 6) 9월에 처음 등장하며, 931년(경순왕 5) 2월에 고려 태조를 모셔 잔치를 베풀 때까지 궁궐 안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월지 주변의 건물터는 형식과 규모로 보아 대규모의 궁궐이 이곳에 조성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특히 월성과 가까운 못 남쪽에도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고 못 이북에서도 새롭게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어서 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전체가 한 궁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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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전지(안압지)
임해전지(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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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 주변에서 발굴된 건물만 20여 채가 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모두 태자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발굴조사와 복원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의 조사가 미루어져 오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연못 북쪽, 즉 시가지 쪽으로 조사 영역을 넓혀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조만간 통일기 신라 왕궁의 범위가 확인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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