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남·북국시대
  • 2. 발해(699년∼926년)
이강근

발해와 신라는 7세기 말기부터 10세기 전기에 걸쳐 각기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며 존재하였던 왕조이다. 곧,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유민(遣民) 가운데서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지금의 조양)로 강제 이주를 당한 유민들이 주체가 되어 건국한 왕조이다. 696년에 거란족 추장 이진충이 영주를 점령하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자, 이를 관망하던 고구려계 장수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동모산을 근거지로 오동산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진국(震國)이라 하였으며 이로부터 얼마 뒤에 국호를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드넓은 국토를 적은 인구로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전국에 5경을 두고, 시세에 따라 그 사이를 천도하였는데, 그 가운 데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 가장 오래 도읍하였다. 발해는 4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겼는데 이 가운데 3차례의 천도는 모두 문왕(文王, 재위 737 ∼793) 때 행해진 것이다. 5경이란 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서경압록부·남경남해부를 말하며 같은 시기에 당나라가 4경을 두었던 사실과 대조된다. 5경 가운데 왕도(王都)가 되었던 곳은 상경·중경·동경 등 3곳뿐이다. 상경용천부는 현재 중국의 동북 3성 중 하나인 흑룡강성 영안현 목단강시 발해진에 속해 있는데, 궁성터와 외성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일제침략기에 초보적인 발굴조사가 있었고, 1970년대에 들어와 북한과 중국의 본격적인 공동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잘 정비·보존되고 있다. 상경 용천부의 도성은 일제강점기에는 ‘동경성’으로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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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상경용천부 도성 평면도
발해 상경용천부 도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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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용천부 성문 입구인 오봉루
상경용천부 성문 입구인 오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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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년부터 926년까지 130여 년 동안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은 궁성·황성·외성 3겹으로 둘러져 있다. 외성의 평면은 남북벽보다 동서벽이 더 긴 장방형이며 성벽에는 10개의 성문을 냈는데 동 벽과 서벽에는 2개, 남벽과 북벽에는 3개씩 문을 내고 각 문을 연결하는 큰 가로들을 종횡으로 연결하여 성안을 구획하였다. 궁성과 황성을 제외한 성 안의 모든 구역은 황성 정중앙의 남문으로부터 외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주작대로(폭 110m)를 중심으로 하여 동구(東區)와 서구로 나누어져 있고 각 구는 정연한 이방(里坊)들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각 이방들은 ‘田’자 모양으로 조직되어 내부에 작은 도로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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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상경성 황성 평면도
발해 상경성 황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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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성 모형도
상경성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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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연한 계획 아래 형성된 도시에는 시장이 열려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물자를 생산·공급하는 한편, 관료와 평민들의 주거와 사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현재까지 9곳의 절터가 확인되었고 거기에는 석등과 장륙불상이 남아 있으며 발굴 조사에 의하여 동불(銅佛)·도불(陶佛)·철불·금동불 등 다양한 불상이 출토되었다. 또 온돌과 굴뚝을 갖춘 살림집도 발굴되어서 그 시기에 민간의 살림집에서도 온돌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있으며 궁성과의 사이에 폭 65m인 도로가 가로 놓여 있고 이 도로의 동쪽과 서쪽에 성문을 두었으며 궁성 남문의 남쪽에는 거대한 광장을 두고 그 남쪽 끝에 황성 남문을 두었다. 황성은 동구·중구·서구의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서 두 구역에서 10여 곳의 관청터가 확인되어서 발해의 중앙 통치기구인 3성 6부의 일부로 짐작되고 있다. 중 구는 궁성 남문의 남쪽에 지세가 평탄한 광장으로 국가적인 의례가 거행되던 장소이다.

궁성은 외성 중앙부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석축으로 쌓은 둘레 약 4㎞의 장방형 성인데 중심부와 동, 서, 북구의 4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구역은 성장(城墻)으로 가로막혀 있다. 궁성 안에서는 건물터 37개소가 확인되었는데 그 가운데 중심 구역에 있는 5개의 궁전터가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이 궁전터들은 궁성 중구의 중심축을 따라 남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차례로 놓여 있으며 터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남쪽으로부터 제1궁전터, 제2궁전터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제1궁전터부터 제3궁전터까지는 왕이 정치를 행하던 정전·편전 등으로 생각되며, 온돌을 갖춘 제4궁전터는 왕의 침전, 제 5궁전터는 다른 용도로 사용된 건물로 짐작되고 있다. 궁전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제4, 제5궁전 사이에만 회랑이 없다. 궁전터의 바닥은 벽돌바닥·회바닥·모래흙바닥 등 다양하며 궁전 터의 기단부에는 사자머리 석상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궁정의 동구·서구·북구에는 못, 가산(假山), 정자터 등이 남아 있어서 모두 금원지(禁苑址)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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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석등
발해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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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궁성 앞에 황성을 두고 황성 남문 앞에 주작대로를 열고 그 좌우에 시가지를 대칭으로 형성한 다음 외곽을 다시 성으로 둘러싸는 도시 계획수법은 당의 장안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경 용천부에 남아 있는 석등, 석불 등을 통해 고구려의 자(1자는 35㎝)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 출토된 건축 재료들인 치미·귀 면와·와당 등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발해 문화의 성격은 고구려 문화의 전통 위에 당시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던 당의 문물제도를 융합시킨 새로운 문화임이 분명해졌다.

현재 알려진 유적은 대부분 제11대 왕 대이진(재위 831∼857) 때 중건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를 동단국(東丹國)으로 개칭하고 상경을 천복성(天福城)으로 개명하여 통치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 928년에는 동단의 왕실 귀족과 발해 유민들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평(東平, 오늘날의 遼陽)으로 옮기고 백성들도 모두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상경용천부는 심한 파괴를 당했는데 현재 발굴에 의하여 출토되는 불에 탄 많은 유물들을 보면 성안의 관청·민가·문루·궁전 등 대다수가 화재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폐허화된 상경용천부가 문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인 청나라 초기에 와서부터이다. 이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곳을 금나라의 상경 회녕부 고지(故地)라고 잘못 인식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와서 시행된 과학적인 발굴 조사에 의해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발해 상경용천부 도성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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