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3. 고려 왕조의 궁궐
  • 이궁(離宮)
이강근

임금의 거처인 정궁이 불타 버리는 경우나 천재 지변 등을 대비하여 궁성 밖에 따로 이궁 또는 별궁을 두게 마련이다. 1126년의 화재 이후에 인종은 주로 연경궁(延慶宮, 뒤에 仁德宮으로 고쳤으나 계속 연경궁으로 통용됨)이나 수창궁(壽昌宮)에 거처하였다. 사료에서는 이런 경우를 이어(移御)라 하고 다시 정궁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환어(還御)라고 하여 정궁과 이궁의 품격이 다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인종 때에는 궁궐 관계 사건이 몇 가지 발생하였다. 즉, 인종 6년 2월에는 남경 궁궐에 불이 났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인종 7년에는 옛 임원역 터에 대화궁(大華宮, 또는 大花官)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서경에도 건국 초기부터 중요성을 인정하여 성을 쌓았는데 마침 정궁이 소실된 때를 이용하여 묘청·정지상 등 서경파에 의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묘청의 난으로 비화되고 반란이 진압되자 새로 지은 궁궐도 버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궁이 불에 탄 지 6년 뒤, 대화궁이 지어진 지 3년 뒤인 인종 10년(1132)에야 다시 정궁의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고 6년 만인 인종 16년(1138)에 왕은 정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렇듯 어렵게 완성된 정궁은 이로부터 33년만에 다시 원인 모를 화재로 모두 불타 버린다. 그런데 이 40년 사이의 25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의종 (1146∼1170)은 고려시대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새로 지은 궁궐에 거처하기를 꺼려하였고, 풍수지리 및 도참설을 신봉하였다. 술사(術士)들의 말에 따라 수많은 개인 집을 빼앗아 이궁으로 만들어 때때로 옮겨 다니면서 호화로운 건축과 조원을 여러 곳에 만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수덕궁(壽德宮)과 양이정(養怡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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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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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11년에 동생인 익양후(翼陽侯) 호(晧)의 집과 그 부근의 민가 50여 채를 헐어 그 자리에 태평정·양이정·관란정(觀瀾亭)·양화정(養和亭) 등을 세웠는데, 특히 양이정의 지붕은 청자와(靑瓷瓦)로 덮었을 정도로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 수막새, 청자 암막새 등이 주목되는데 이 기와들은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의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93)고유섭, 『松都의 古蹟』. 정치보다는 개인적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던 의종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의 난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귀족 문화의 절정기인 12세기에 이룩되었던 당시의 궁궐 건축은 지극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축이었을 것이나 그 터가 확인된 곳은 거의 없어서 위의 청자기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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