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4. 조선 왕조의 궁궐
  • 경복궁(景福宮)
이강근

태조 4년(1395) 9월 29일의 『태조실록』 기사에는 창건 당시 경복궁의 규모·배치, 각 건물의 기능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곧, 연침(燕寢)·동소침(東小寢)·서소침·보평청 등 내전 건물과 정전·동서 각루(東西角樓)·주방·등촉인자방·상의원·양전사옹방·상서사(尙書司)·승지방(承旨房)·내시다방(內侍茶房)·경흥부·중추원(中樞院)·삼군부(三軍府)·동서누고(東西褸庫) 등 390여 칸 규모의 궁궐 건축이 기록되었다.

창건 당시의 경복궁은 왕권이 강화되기 전에는 유신들이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궁궐이었다. 그러나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치가 안정되고 권력이 왕에게로 집중되자 경복궁에서는 건축상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또 경복궁 동 쪽 종묘 옆에는 이궁인 창덕궁까지 생겼다. 태종 때에는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고, 세종 때에는 동궁·후궁·혼전·학문 연구 기관 및 후원까지 완비하여 이른바 ‘법궁체제(法宮體制)’를 완성하였다. 또 주요 전각뿐만 아니라 문에도 고유한 이름이 붙여졌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창건 때는 보평청) 좌우에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을 더 지었고, 연침인 강령전 일곽 뒤쪽에 새로 교태전과 함원전을 비롯하여 자미당·인지당·청연루·종회당·송백당 등 후궁을 지었다. 동궁은 세자가 백관의 조회를 받는 계조당과 서연 및 시강을 받는 자선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후원에는 못을 파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취로정을 세웠다. 태조 때 창건된 경복궁은 세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궁다운 모습을 갖추었으며, 이후 100여 년 뒤인 명종 8년(1553)까지는 거듭 발전하여 조선 전기에 이룩된 궁정 문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명종 8년의 화재로 정전, 편전 일곽을 제외한 내전 일곽이 모두 불에 타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중건되었다. 더구나 그것마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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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궐도형 상의 경복궁 배치도
북궐도형 상의 경복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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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중건한 것은 그로부터 270여 년만인 고종 2년(1865)이었다. 이 해 4월 2일에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를 계기로 중건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혹심한 재정적 궁핍을 겪으면서도 중지되지 않고 2년 7개월만인 1867년 11월에 일차적으로 낙성되었다.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270여 년만에 이어(移御)가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8 개월 후인 1868년 7월 2일이었다. 중건 공사는 궁성(宮城)·내전(內殿)·외전(外殿)·경회루(慶會樓)·별전(別殿)·행각(行閣)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신무문 밖 후원에 새로운 건물인 융문당·융무당·비천당 등이 창건된 때도 1868년이었다. 정부 기관의 시무처(視務處)인 궐내각사(闕內各司)도 계속해서 지어졌는데 공사가 마무리되어 영건도감(營建都監)이 해체된 것은 기공한 지 7년 5개월 만인 1872년 9월이었다. 궁궐 깊숙이 자리 잡은 향원정 북편에 건청궁(乾淸宮)이 지어진 때는 영건도감이 해체된 뒤인 187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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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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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73년 12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대비전인 자경전(慈慶殿)이 소실되었다. 3년 뒤인 1876년 4월에 자경전을 중건하고 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인지당(麟趾堂) 등을 고쳐 지었다. 이로부터 7개월이 지난 11월에 다시 큰 불이 나서 교태전 일곽, 자경전 일곽, 강령전 일곽 등 총 830여 칸이 모두 불타 버렸다. 이 화재로 조선 후기의 궁중 문화를 담고 있는 모든 유산이 함께 소실되었으며, 대보(大寶)와 동궁의 옥인(玉印)만을 겨우 건져 냈을 뿐이다. 이때 소실 된 건물은 1888년(고종 25)에 모두 복구되었다. 1893년에는 신무문 밖 후원,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경농재(慶農齋)·대유헌(大酉軒) 등을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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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경전
경복궁 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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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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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지은 건물의 내역은 『궁궐지(宮闕誌)』(고종 때 간행)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아울러 「북궐도형(北闕圖形)」·「북궐후원도형(北闕後苑圖形)」이란 이름의 배치 평면도에 잘 그려져 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완성된 궁궐은 궁성 둘레 1,813보, 높이 20여 척, 규모 7,481칸에 이르는 대규모의 장엄한 궁궐이었다.

경복궁은 궁성 영역과 궁성 북쪽 밖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가운데 후원 지역은 일제침략기에 조선총독 관사 부지로 사 용되면서 경복궁에서 분리된 이후 경무대와 청와대로 전용되기에 이르렀다. 궁성 안의 면적은 92,333평(305,233.1㎡)인데, 궁성 내부는 앞에서부터 뒤로 조정과 침전(前朝後寢), 후궁과 후원의 4영역으로 나누어진다. 후원 지역 동북쪽에 진전, 서북쪽에 빈전과 혼전, 중심부에 향원정을 포함한 건청궁 지역과 집옥재(왕실도서관) 등을 배치한 것은 중건된 경복궁의 특징이다. 광화문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광활한 마당 중앙에는 행각을 한 겹 더 둘러 조정에 권위와 엄숙함을 더하고, 왼쪽에 궐내각사(승정원·홍문관·내각·빈청·내의원·내반원·사복시)를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한편, 오른쪽에는 궁궐의 호위와 경비를 전담하는 오위도총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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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집옥재
경복궁 집옥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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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의 왼쪽에는 경회루와 수정전, 오른쪽에는 왕위계승자인 세자의 거처인 동궁을 음양이론상 동쪽에 배치하였다. 왕과 왕비의 침전은 궁성 내부의 중심에 배치하고 그 동북쪽에 대비전을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 뒤로 후궁이라 하여 왕실 가족의 생활을 보좌하기 위하여 음식 만들고, 옷짓고, 빨래하는 장소가 수많은 건물로 지어 져 배치되었다. 그 뒤에는 연못과 정자로 후원을 꾸미고 여기에 독서실과 서재 등을 지어 휴식과 독서로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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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수정전
경복궁 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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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회루
경복궁 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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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성 밖 북쪽의 후원(현 청와대 지역)은 강무(講武, 활쏘고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것)를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건물 가운데 현존하는 건물은 광화문(석축만 원형, 1865), 건춘문(1865), 신무문(1871), 동십자각(1865), 근정전 일곽(1865), 사정전과 천추전(1865), 자경전(1888), 제수합·함화당·집경당(이상 1865), 수정전(1865), 경회루(1865), 향원정(1865), 집옥재와 협길당(1873 창덕궁에 창건, 1891년 경복궁으로 옮김) 등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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