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4. 조선 왕조의 궁궐
  • 경운궁(慶運宮)
이강근

1896년 고종 왕실이 일본의 침탈을 피하여 외국공사관 주변으로 피신한 소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 고종의 시어소(時御所)로 쓰이다가, 대한제국 선포 이후 궁궐로서의 시설과 격식을 갖춘 다음 황제궁으로 격상되었다. 중건 당시의 원형은 1904년의 화재 이후 재건 과정에서 작성된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통하여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몇 채 안되는 건물은 거의 모두 이때 재건된 것이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이후 그 거처가 되면서 상왕(上王)의 궁이란 뜻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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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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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덕수궁평면도(德壽宮平面圖)」를 토대로 당시의 궁역과 배치형식을 살펴보면 궁역이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궁역의 동남쪽은 현재 정문인 대한(안)문을 비롯하여 중화전·함령전·석어당·즉조당·준명 당·정관헌 등이 남아 있는 곳으로 당시에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갖추어져 있었던 궁궐의 중앙부였다. 둘째, 궁역 서쪽 미국영사관과 러시아영사관 사이에는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현존) 일곽과 환벽정이 있어서 접견실과 연회장으로 쓰였다. 셋째, 궁역 북쪽은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었던 곳으로 왕실 내 제사를 위한 영역이었다. 3영역 가운데 현재 궁역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곳은 오로지 중화전 일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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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중건배치도(1907∼1910 추정)
경운궁 중건배치도(1907∼1910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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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고종 사후에는 일제침략자들이 궁터를 매각하고 궁전을 훼손하여 공원으로 만드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은 시민공원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헐린 건물 가운데 선원전·의효전·가정당 등은 창덕궁으로 이건되거나 창덕궁 내 건물 신축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식민통치를 받던 민족수난기에 석조전은 일본인들의 미술품을 진열하는 곳으로 변경되었다. 또 1936년 8월부터 1937년 사이에 석조전 옆에는 2층 석조 건물이 증축되어서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사용되었다. 이로써 1908년에 일인들이 세운 창경궁 내 박물관에 보관되어 온 우리 문화재를 이곳에 옮겨 보관하게 된 것이다.

현황을 토대로 경운궁의 궁역을 추정하여 보면 서쪽은 주한미국대사관의 남쪽 길을 따라 전에 러시아공사관이 있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 앞길을 따라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궁역 안에 영국·미국·러시아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도로가 개설되고 서양식 건축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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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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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령전
함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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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준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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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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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하여 일제침략기의 훼손으로 대한제국 시기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중화전 일곽에 남아 있는 전통 건축은 대한문·중화문·중화전과 행각 일부·즉조당·석어당·준명당·함녕전과 그 행각·귀빈실·덕홍전·정관헌·광명문뿐이며, 서양식 건축으로 석조전 일곽과 부속 정원이 남아 있다. 이밖에 궁역 서쪽 미국대사관 옆에 중명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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