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를 내면서
  • 한국의 사냥 어떻게 발달해 왔을까?
심승구

인류의 출발과 더불어 시작된 사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무대에서도 한민족의 형성과 함께 이루어져 왔다. 원래 사냥감이었던 인류의 조상은 도구를 발명하고 지능을 발달시키면서 점차 사냥꾼의 존재로 변모하였다. J. C. 블록의 『인간과 가축의 역사』에 따르면, 사람과 다른 포유동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수렵이었고, 수렵활동이 인간의 지능을 현저하게 높이는 원인이 되어 뇌의 대형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득히 먼 시기로부터 사냥 도구와 사냥 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진화를 거듭나게 한 하나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사냥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다.

구석기시대 이래 사냥은 채집과 함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생산활동이었다. 알타미라 벽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냥에 대한 열망은 일찍부터 풍요를 비는 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사냥으로 잡은 동물의 고기는 단백질을 공급하는 식량으로 먹고, 가죽은 옷감으로 걸치며, 뼈·뿔·발굽 등은 도구를 만드는 연장의 재료로 쓰는 한편, 주술적 상징으로 이용하였다. 석기시대 사람들이 동굴과 같 은 주거지에 공통적으로 늑대의 머리뼈를 놓아둔 사례는 원시인들의 주술적 생활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고단하고 치열한 유목적 삶을 사는 가운데 인류는 사냥의 도구와 방법, 그리고 기술은 물론 동굴 벽화와 뼈에 새긴 주술과 신앙까지 독특하고도 다양한 사냥문화를 고안해 냈다.

최근에 밝혀진 유전학 정보에 따르면, 약 1만 년 전 한반도에 농경을 도입한 존재들과 현대 한국인과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약 1만 년 이전에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주 생산 활동이 수렵과 채집 위주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이 땅에 농경이 들어온 후에도 수렵은 그 비중이 다소 감소되었지만,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산활동에서 그 중요한 기능이 사라지지 않았다. 농경의 도입은 수렵의 감소보다는 채집의 감소로 이어졌고, 이 무렵부터 서서히 수렵을 대신할 야생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었다. 남성 위주의 사냥문화는 채집활동을 자연스럽게 여성이나 노약자의 몫으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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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청동기시대에 농경이 확대되면서도 사냥 도구와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말해지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호랑이·멧돼지·사슴 등의 육지 동물뿐 아니라 다양한 고래와 같은 바다 사냥의 묘사는 당시 사냥의 모습을 생생하게 잘 보여준다. 창과 화살, 작살, 그리고 함정의 이용까지 다양한 사냥 도구와 방법, 그리고 기술도 확인된다. 사냥이 농경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장 중요한 생활 방식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그 결과 당대인들에게 사냥의 능력은 한 씨족이나 집단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 그리고 권력자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고대의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의 영웅 신화가 모두 탁월한 사냥꾼으로 묘사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사냥 도구는 국가 성립과 함께 무력을 사용하기 위한 무기로 개발되었다. 그 동안 생산 도구였던 사냥 도구가 계속되는 전쟁과 맞물려 살상용 무기로 변화되었다. 그러자 사냥은 단순히 경제활동에 그치지 않고 권력획득과 체제유지를 위한 물리적 기반인 동시에 정복전쟁을 위한 군사적 수단으로 확대되었다. 고대 국가에서 제왕들의 순수(巡狩) 또는 순행(巡行)이 사냥을 겸한 군사활동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전국을 돌며 사냥을 겸한 국왕의 군사훈련은 지역의 통제와 민심 수습을 위한 거의 필수적인 통치행위였던 것이다.

사냥은 군사훈련과 함께 국가제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춘추좌씨전』에 ‘국가의 대사(大事)는 제사와 군사에 있다’는 말처럼, 일찍부터 나라의 제사는 군사와 함께 국가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제천(祭天)과 종묘 등 각종 국가 제사에 쓸 제물, 즉 천신(薦新)을 마련하기 위한 사냥은 늘 국가적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고려왕조가 천신을 국가의 제사의례로 정비한 것은 그만큼 제사를 위한 사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여기에 국왕을 비롯한 왕실가족의 일용(日用)에 쓸 진상(進上)을 위한 사냥도 계속되었다. 주변국과의 외교를 위한 특산물을 확보하기 위해 응방(鷹坊)과 같은 조직을 두는가 하면, 원이나 명나라에 진헌(進獻)하기 위해서도 사냥이 성행하였다. 천신·진상·진헌 등을 위한 사냥은 국가운영을 위해 민간에서 부담해야할 고된 공물(供物)이자 부역(賦役)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사냥은 민간의 차원뿐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삼국시대 이래 국왕이 주도하는 사냥은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야외의 유희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려의 경우에 국왕이 사냥으로 인해 국정을 소홀히 하고 대규모 군사동원에 따른 민간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사냥이 생산적인 경제활동인 동시에 국가운영의 폐단을 야기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국가의 기강해이와 함께 집권체제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조선왕조가 건국 직후에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국가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인 군례(軍禮)로 정비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국왕의 자의적이고도 임의적인 사냥을 철저히 차단하여 사냥을 정례화함으로써 국정의 소홀을 막고 민간의 폐단을 줄이며 국가운영의 합리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려사회 이래 계속되어 온 국왕의 사냥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국가의례의 하나로 확립되는 특징을 갖는다.

역사적으로 사냥에서 가장 큰 변화는 총포의 발명이었다. 종래의 활·창 등과 같은 도구를 사용한 사냥꾼은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총포의 등장은 이 같은 위험으로부터 사냥꾼을 보호하는 한편, 사냥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총포의 등장은 사나운 맹수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위협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총의 존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맹수들에게 총은 그 소리만 들어도 10리를 달아나는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 사냥꾼을 흔히 ‘포수’라고 붙이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총이 가져다 준 사냥의 변화는 그만큼 컸다.

포수가 사냥꾼을 대표하는 상징어가 되었듯이, 총은 이전까지의 사냥문화를 변화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집단 몰이사냥의 형태가 소수의 개개인이 얼마든지 맹수를 상대로 포획하였다. 이로부터 인간과 동물과의 불균형은 급속히 무너져 갔고, 동물은 인간의 보호나 관리를 받지 않으면 사라지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사냥의 대상이 된 동물은 늘 사냥감으로만 존재하지 않았 다. 맹수에 의한 민간의 피해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를 위해 조선왕조는 별도로 착호갑사 또는 착호군 등과 같은 특수부대를 만들어 해결해 나갔다. 사실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들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호환·마마’가 가장 큰 공포였을 정도로 조선 후기까지 호환의 피해는 사회불안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도성의 궁궐에서부터 벽촌 마을까지 호랑이나 표범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으며, 호환에 물려 죽은 자가 한 해 평균 보통 수백 명이 넘을 정도였다. 호랑이 사냥이 단순히 가죽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맹수의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절실한 사회적 과제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맹수 피해를 치유하기 위한 각종 기양의례나 범굿 같은 민간신앙이 더욱 성행한 점도 호환의 피해가 적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사냥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가 그대로 담겨진 특색을 지닌다. 고대 국가 이래 사냥을 이용하여 국가 권력을 만들어 가는가 하면, 호랑이의 피해 때문에 한옥의 가옥구조가 ‘ㄷ’자 형태의 폐쇄적 구조를 가진다거나 지명에 노루목·여우골·범골 등 다양한 동물 이름이 등장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방방곡곡 사냥꾼 내지 포수와 관련된 민담과 전설,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사냥은 한국의 풍요로운 역사문화 자원으로 이어져 왔다.

전근대사회에서의 사냥은 매우 중요한 경제활동임은 물론 정치·군사·외교·종교·문화·예술 활동과 관련을 갖는다. 그러다가 근대 이후에는 레저스포츠로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의 사냥은 오히려 생태환경의 유지를 위한 개체 수의 조절이나 환경파괴나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이루어진다.

사실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사냥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인간을 생존하게 한 기반인 동시에 수많은 야생동물들을 멸종시켜 온 어두운 측면을 갖고 있다. 여기에 일제가 식민지시기 한국에 서식하 는 동물들을 무차별 남획한 사실은 생태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호랑이를 비롯한 수많은 야생동물들은 거의 사라져 특별한 보호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기야 한반도를 무대로 한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 인간만을 남겨 놓았다.

이와 같이 한국 사냥의 역사는 단순히 오락이나 레저의 관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생태환경을 근본적으로 뒤돌아보게 하는 한편, 우리의 삶의 방식과 생활 문화를 살펴보는데 매우 귀중한 관점을 제공한다. 21세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앞에서 우리는 지금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지혜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라는 고민에 직면해 있다. 한국 사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는 그 의문과 문제의식을 고민하는데 조그만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까지 국내의 사냥에 대한 연구동향은 단편적인 접근에 머물거나 특수한 한 지역의 사냥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서양의 경우에는 사냥과 관련된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냥수기』(을유문화사, 1960)가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더욱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냥이 인간 문화에 중요한 역할과 의미가 있음을 지적한 이래, 서양학계는 사냥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이에 비하면 사냥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다만, 최근 김광언이 『한·일·동시베리아의 사냥』(민속원, 2007)을 통해 고대 한국, 일본, 중국 동북부, 동시베리아 등지의 사냥 문화가 한 줄기였음을 밝힌 인류학의 노작이 돋보인다. 한국의 사냥문화에 대한 연구는 한국인의 생활환경, 그 속에서의 삶과 생산양식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사냥은 일상과 관련한 제의체계·축제·국가권력·전쟁·군사훈련·신앙·경제활동·민중생활 등 다양한 분야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한국인의 형성과정과 더불어 시작된 사냥 문화는 민족의 기원을 이해하고 초기 한국인의 삶의 흔적을 찾는데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국가 성립 이후 사냥이 개인은 물론 국가체제의 유지와 발전에 어떻게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냥은 하늘신을 비롯해 각종 종교적 제의와 신앙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닌 국가운영의 핵심적인 문화로 떠오른다. 국가권력과 사냥의 관계는 근대 이전 사회에 계속되는 통치수단의 하나였다. 사냥은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진 경제활동인 동시에 지역적 특성에 맞는 사냥방법과 수단이 동원되어 그 지역사 내지 지역생활사를 밝히는 데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한다.

사냥의 발전은, 곧 사냥기술과 사냥법의 발전에 기초해 발달해 왔다. 이 과정에서 활이나 창에서 총포가 발명된 이후 총 사냥문화는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근대 이후 경제생활의 발전은 사냥을 더 이상 경제생활 수단으로서보다는 취미나 오락의 수단으로 크게 변화시켰다. 오늘날 생태환경이 중시되는 상황에서 사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는 인간만을 위한 삶의 조건에서 탈피하여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계를 위한 중요한 교훈과 가치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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